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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un 01. 2024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저 / 허진 역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이거 비밀이에요?"

"뭐?"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알겠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


*****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             +++++



슬픔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글이다. 나탄 밀슈타인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듣는 기분이다. 고요한 열정으로 차오르는 슬픔이 행복감을 극대화한다.


클레어 키건의 글은 기호학이다. 독자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인물과 서사를 풀어놓지만 그 너머의 헤아림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글의 핵심은 행간에 있다. 단편이라기엔 길고 중편이라기엔 짧은, 비정형 길이의 긴 단편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확고한 믿음에 있다. 독자로서는 저자의 자신감이 읽힌다. 더 길게 부연하지 않고도 모든 정황과 모든 감정선이 충분히 읽히는 글이 가능하다는.


소녀는 뭔가 심상치 않은 가정 환경에서 지내왔다. 기존 환경에 대해 작가는 굳이 장황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라는 문장으로 충분하다.


아직 슬픔이란 감정을 인지할 나이에도 이르지 못한 소녀는 그래서 더 슬퍼 보인다. 모든 게 느리고 정갈한 그 집에서 소녀는 사랑을 처음 맛본다. 슬픔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맛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고요와 사랑을 경험한 소녀의 이후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슬픔도 사는 힘이 된다. 오히려 행복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된다. 행복은 밖으로 발산되며 흔들리지만 슬픔은 안으로 깊어지고 단단해져 뿌리가 된다. 소녀는 강한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어서 행운이었다는 사르트르처럼 지표가 되어줄 부모를 갖지 못한 자는 스스로 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건 양친 모두가 다정과 올바름으로 일관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결코 흉내내거나 훔칠 수 없는 본질이 되어 준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진정한 강함은 유함에서 오고, 유함은 내적 충만에서 오며, 내적 충만은 사랑에서 비롯되는데, 사랑도 배워야 안다. 겨우 수개월이었지만 먼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가 보여준 사랑은 소녀의 가슴에 박제되어 가장 큰 삶의 지표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본래의 가정으로 돌아간 소녀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저씨를 향해 달음박질을 하는 소녀가 안심이 된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팠겠지만, 그러고 난 다음엔 아주 오랬동안 강인했을 것이다. 강해진다는 건 행복이나 사랑보다 얻기 힘든 것이고, 그만큼 더 값진 것이다.

그러니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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