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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ul 05. 2024

스토너

존 윌리엄스 저 / 김승욱 역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평범함에 대한 찬양이다. 발레리아 강수진 씨의 발이 생각난다. 혹독한 자기 검열로 연습의 연습을 반복하느라 발가락이 이리저리 휘고 옹이가 진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이 한동안 인터넷을 달궜었다. 그때도 그 발을 보며 이렇게 대단한 범세계적 예술가가 아니라도 우리들 누구나 이런 발 하나쯤은 각기 다른 곳에 품고 산다고 생각했었다. 평범한 생이라고 해서 생에 대한 태도나 노력까지 평범한 건 아니다. 위대하거나 평범한 건 노력의 결과일 뿐, 누구나 주어진 삶에 대한 최선의 길을 간다. 평범함도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값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스토너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부모의 힘겨운 농사일을 나눠 짊어진다.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허드렛일보다 조금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이 밭일을 맡게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스토너의 아버지는 바야흐로 농사도 배워야 하는 시대라는 생각에 아들에게 대학 교육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입학한 미주리 농과대에서 운명처럼 영문학을 만난다. 필수과목이었던 영문학 개론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는 예리하게   강의로 스토너를 매료시킨다. 친구가 없었던 스토너는 대학 도서관 서가에 파묻혀 지냈고, 그렇게 4학년 중반이 되었을 무렵 아처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석사과정을 제안한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박사과정은 강의를 하면서 밟을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스토너 필생의  만나는 순간이다.


이후 아내인 이디스에게  눈에 반해 결혼하고 뜻밖의 () 격차와 주기적인 이디스의 신경 발작으로 고독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다 세미나 청강생이었던 캐서린을 만나 열정을 다하지만 세간의 시선과 서로의 장래를 고려 결별한  급격하게 약화된 건강이 결국 뇌종양으로 이어져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고독하고 고단한 생의 모든 순간에 영문학이 있. 아내와의 불화, 아내가 고의적으로 소외시킨 딸아이와의 관계, 그로 인한 딸아이의 불행한 선택과 알콜 중독, 무엇보다 열정을 다했던 캐서린과의 결별에 이르기까지 스토너는 어떠한 상황에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독자가 무력감을 느낄 만큼 순응한. 영문학을 반려 삼은 자의 깨달음이다. 


스토너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무례한 이디스를 견디는 대신 이혼을 했더라면, 영혼의 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캐더린과 영문학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러나...


후회는 없다. 그럴 필요가없다. 우리에겐 선택해보지 않은 반대편 길이 있을 뿐 다른 생은 없다. 누구나 이변을 꿈꾼다. 뭔가 대단한 운명이 오늘의 남루한 일상을 전복시켜 주길 바라며 숱한 선택으로 항거하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모퉁이를 돌아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뿐이다. 방금 전 그 길에서와 같이 감내해내야만 한다. 스토너의 무력해 보일 만큼 순순한 삶의 태도는 그래서 위대하다하루하루 묵묵히 일상을 끌고 가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니 오늘도 그저 살아낸다. 이미 충분히 위대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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