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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차원이 다른 그의 언어 세계

by 글섬


"컴컴한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는다. 컴컴한 하늘 아래, 컴컴한 숲속.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내가 지금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허한 말이다. (…)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수많은 움직임, 헝클어진 움직임, 거칠고 불규칙적이며 고르지 않은 움직임들이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물어볼 수는 있는 일이었던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존재가 말한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


- <샤이닝> 중에서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 어디 그뿐이랴. 인간이 무에서 무 같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는 있다 해도,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 이상의 많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 다른 것들이란 무엇인가?"


- <아침 그리고 저녁> 중에서



"아슬레가 눈을 뜨자 그곳에, 그의 눈앞에 알리다가 아기 시그발을 가슴에 안고 이리저리 어르고 있다, 너는 그저 잠이 들렴, 울지 말고, 그저 살아 숨 쉬렴, 그저 행복하고 진실되렴, 그저 살아서 네가 되렴, 하고 알리다가 말하며 아기 시그발을 이리저리 어른다 그리고 아슬레는 아주 파랗게 반짝이는 피오르를 바라본다, 오늘은 피오르가 푸르게 반짝이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알리다는 자신과 아슬레가 여전히 연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서로 함께해, 그는 나와 함께하고, 나는 와 함께해, 나는 그 안에 있고, 그는 내 안에 있어, 하고 알리다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바다 저편을 내다보고, 하늘에서 아슬레를 본다, 그녀는 저 하늘이 아슬레인 것을 보고, 저 바람이 아슬레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저기 있어, 그는 바람이야, 그를 찾지 못해도 그는 여전히 저기 있어, 그러자 그녀의 귀에 아슬레가 말하는 것이 들린다, 나는 저기 있어,"


- <3부작> 중에서




샤이닝은 짧다.

이 짧은 글을 읽고 했던 생각은 글보다 욘 포세.

뭐지, 이 중량감 있는 사차원 작가는.

그리고 욘 포세에 대해 했던 생각은 딱 두 가지.

사뮈엘 베케트, 그리고 천재.


짧은 내 식견으로는 한 작품으론 턱없이 부족한 느낌에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3부작>을 연달아 읽었다. 그런 다음, 다시 <샤이닝>을 읽었다.


욘 포세의 작품에는 작품 전체를 통털어 마침표가 서너 개 정도뿐이다.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그리하여, 등등 접속사가 운율처럼 매 문장마다 이어진다. 그래서 어떻냐면, 강물 같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고요히 흐른다. 따라서 독자도 멈추지 못한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읽어내릴 따름이다.


그런데 샤이닝에는 욘 포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무수한 마침표들이 존재한다. 이들 마침표의 역할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적어도 샤이닝에서는 그렇다. 다른 작품에서의 마침표는 확신, 더 이상 변하지 않을 확정적 무언가를 의미하는데, 샤이닝에서는 마침표마저 모호한데도 어쨌든 마쳐졌으므로 섬뜩하다. 때 아닌 마침표들의 행렬은 불안으로 점철된다.


여느 독후감처럼 어느 문장을, 혹은 문단을 따로 떼어내 인용하기가 좀체 여의치 않다.(내지는 의미가 없다.) 전체가 하나이므로. 그리고 모든 인물이 하나이고, 심지어 어제와 오늘이, 현실과 의식도, 삶과 죽음마저 모두가 하나이다. 인물의 의식과 기억, 바람과 확신, 과거와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하나로 연결되어 그저 흐른다. 이게 어떻게 글로 가능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샤이닝은 형식적으로는 전혀 사뮈엘 베케트와 유사하지 않다. 그런데도 겨우 8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게다가 폰트도 크고 행간도 넓은) 거의 단편에 가까운 소설의 중반에도 이르기 전에 이미 사뮈엘 베케트가 떠오른다. '고도'가 보인다. 분명히 '고도'가 보이는데도 '고도'가 아니다. 전혀 다르다. 고도가 무거운 주제를 가뿐히 다뤘다면, 샤이닝은 아무런 주제 없이 생 그 자체를 다만 '조명'한다. 아무런 설명도 묘사도 인물도 사건도 무거움도 가벼움도 없다. 실존적, 초현실적인 면에서 사뮈엘 베케트가 떠오를 뿐, 욘 포세의 경우 존재 이외엔 없다. 이건 또 어떻게 해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만일 사뮈엘 베케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욘 포세는 그 자체로 문학사의 변곡점이었으리라 확언한다.


작가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인물도 서사도 없다. 심지어 존재의 유무도 없다. 그래서 뭘 말하려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것마저, 아니 바로 그게 없다는 말이다. 그저 글이 있다. 그래서 어떤가 하면, 그리하여 삶의 정중앙을 뚫고 지난다. 흔히 인물과 사연, 인과나 사건 들로 인해 흐려지거나 놓치고 있는 삶 그 자체가 글의 흐름을 따라 차츰 선연히 솟구친다. 너의 어제나 오늘, 죄나 그릇됨, 귀하거나 천함, 살거나 죽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네가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한다. 빨려들 듯 글에 홀려 따라가는 동안 알 수 없는 슬픔과 무력감으로 흐물대다가, 욘 포세의 간결한 문장과 어마어마한 행간 덕분에 글이 끝나면 줄거리나 인물 대신 존재 그 자체가 덩그러니 떠오르며 새로이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듯 에너지가 뻗쳐 온다. 희한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다. 그의 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가 느껴진다. 무대가 주연이다. 그러니까 그건 뭐냐면, 존재한다는 것으로 충분한 무언가.


대단한 사람과 동시대를 살고 있구나, 싶다. 아무것도 없는 글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니 말이다. 언어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니 말이다. 욘 포세의 경우 글을 썼다기보단 글이 그에게 온 것 같다. 모차르트의 경우 음이 그에게 온 것처럼. 그러니 보통 인간으로서는 욘 포세를 그저 천재랄 밖에.


이를 증명하듯 욘 표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글을 쓴다면 그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무엇을 쓰는가에 관해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작하고 진행이 되면 잠시 후 나는 극작품 또는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무엇인가가 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 기록해야 한다. 내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게 중요하다 ㅡ 이는 일의 마술이다. 나는 앉아 있다. 피오르의 내 작은 집에.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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