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킹솔버 지음 / 강동혁 옮김
"일단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내 탄생을 지켜보려고 모인 사람들이 꽤 되긴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모이는 정도로 끝이었다. 최악의 임무는 내게 맡겨졌다는 말이다. 엄마는 말하자면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새파란 꼬마 프로 권투선수 같았다. 그게 나중에 페곳 아저씨가 우리 엄마 인생 최악의 날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때의 단어였다. 내게 눈길을 준 최초의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게 보였다면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꼬마 권투선수 같아 보였다는 말은 싸워볼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희박한 확률이라는 건 안다. 사람들이 엄마가 밀어낸 아이의 따귀를 때리며 살아 있는 시늉이라도 해보라고 하는 동안 엄마가 자기 소변과 약병 사이에 뒹굴고 있었다면 그 녀석은 파멸할 가능성이 크다. 약쟁이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약쟁이가 된다. 그는 절대 알고 싶지 않은 모든 존재로 자라난다. 썩은 치아, 생기를 잃은 눈, 어딘가로 도망가버릴 거라 생각했는지 차고에 공구를 넣고 문을 잠가버리는 골칫거리, 경치 좋은 고속도로에서 한참 물러난 곳에 쭈그려 있는 모텔을 주 단위로 빌려 전전하는 생활, 더 좋은 것들을 가질 가능성을 바랐다면, 이 녀석은 알아서 어떤 부유하거나 똑똑하거나 기독교인인, 약쟁이가 아닌 부류의 엄마에게서 태어났어야 한다. 다들 말하듯,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승자로든 패자로든 낙인찍힌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모든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하고, 머릿속에서 끌려 나온 젊은이의 생각을 간간이 넣거나 빼고, 그에 따라 몇 개의 점을 적절히 연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기랄. 어린애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끔찍한 존재다.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면 비참함은 잊고 당신이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굴기 쉽다. 당신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어딘가에 이르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일을 잊는 걸로 마무리 짓는 게 더 쉽다. 그러니 이 일은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는 세 번째 선택지다. 쉽지 않다.
당시에 나는 내 인생이 그보다 나빠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언을 하나 하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라.
다만 내가 하려는 말은 급료의 토템 기둥이 있다는 것이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요소로서 학교가 하나 있고, 사는 곳이 시골이냐 도시냐, 라는 요소가 하나 있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로 누구를 행복하게 만드냐는 것이다. 바닥을 사포질하는 것 같은 정확히 똑같은 일이라도 달러 제너럴 잡화점에서 할 수 있고, 영화배우의 대저택에서 할 수도 있다. 급료를 보여주면 어느 쪽 바닥인지 내가 맞혀보겠다. 부유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거나 평범한 사람이 부자가 된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면, 즉 그 사람들이 남들보다 나아졌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돈이 굴러 나온다. 당신이 돌봐주는 대상이 하류 인생이라면 돈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이 만일 어린애라면, 행운을 빈다. 어린아이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과 관계된 모든 일은 밑바닥에 있으니까.
돈을 받아 가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와, 빚쟁이가 한 푼도 더 벌 수 없도록 차를 빼앗아 가는 게 왜 말이 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선생의 어른 버전일까.
"내가 아는 건 이거야." 선생님이 말했다. "넌 회복력이 있다." 나는 회복력을 고칠 수 있도록 나한테 약을 먹이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고쳐야 한다는 게 아니야." 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강하다는 뜻이지. 모든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삶에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사람들이 뒤를 받쳐주는데 스스로는 알지도 못하는 황금기가 있다고 전에 내가 말했던가? 그게 잔인한 세상이 사람을 물어뜯는 방식이다. 내게는 돌이켜볼 나쁜 세월이 얼마든지 있다. 모욕과 단단한 주먹의 시절이. 근데 말이다. 나를 죽이는 건 황금기다. 내게는 두 번의 황금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개자식답게 그 두 번을 모두 놓쳤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중독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고. 경계선은 미세하다.
나의 재앙은 패스트포워드 탓이 아니었다. 나 자신을 책임지는 건 나였다. 그 순간 내게 경기의 압박감이나 1군 선수로 산다는 것, 그녀를 얻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것 등 너무 많은 걱정거리가 있었다면, 그걸 처리해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나의 행복을 바란 적이 있을까? 그랬다면 나를 아주 잘 속여 넘긴 셈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아마 엄마는 내 행복을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내 행복이 엄마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은.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의 계획에 맞아 들어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앵거스는, 오, 주여. 앵거스는 미친 기적이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방법으로만 살아왔다.
오래 살다 보면 사랑했던 모든 것이 돌아서서 내 눈을 태워버릴 수 있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아무것도 없이 끝을 맞는 인간이 그사이에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나는 성장소설을 애정한다. 예전에는 그저 취향이라고만 여겼는데, 살 만큼 살고 보니 일종의 희망이었다. 나 자신이 아픈 성장기를 통과해온 데 대한 때늦은 희망 같은 거였다. 성장기가 하나의 생을 어디까지 완전하게 망쳐 버릴 있는지는 그 시간을 엉망진창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안다. 이는 반대로 그 시간이 하나의 인생을 얼마만큼 완전하게 떠받칠 수 있는지를 반증한다. 성장기에 온전하고 건강한 사랑을 받은 인간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자기 혐오의 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탄성으로 가득하다. 성장기에 온전하고 건강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인간은 살면서 맞닥뜨려야만 하는 수많은 자기 혐오의 순간을 외면할 수 있는 탄성으로 가득하다. 뭐가 다르냐고? 전자는 내면까지 회복되는 반면, 후자는 실상 내면은 계속 가라앉기만 하다가 운 좋게 결정적 한 방을 피한다면 살아남고, 그러지 못하는 경우엔 마치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한 방의 타격감에 매몰된다. 결국 버티기만 한 거니까. 살았다기보다.
바버라 킹솔버는 1955년생이다. 1955년생의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21세기적이다. 소설의 어린 화자가 직접 서술하는 듯, 인물들 하나하나가 글 밖으로 걸어 나와 먹고 말하고 움직인다.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영감을 얻어 이를 현대적으로 완벽하게 다시 쓴 이 소설은 화자의 탄생부터 성년이 되는 기나긴 시간 못지않게 길고 긴 900페이지 분량의 장대한 서사이다. 1, 2편으로 나누지 않고 단권으로 승부를 본 출판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저자의 발군의 필력과 이야기의 속도감을 확인한 누구라도 소설의 중간 어디에서도 감히 허리를 자를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나쁜 선택"으로 아빠도 없이 태어나버린 데몬은 트레일러에서 자란다,기보단 방목된다. 약물 중독자인 엄마 대신에 이웃인 페곳 부부가 수시로 데몬을 돌봐주는 게 그나마 행운이다. 데몬이 태어난 이후로 엄마는 많은 남자 친구들을 사귀어보고 실패한 다음, 데몬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데몬을 돌보기 위해 월마트에 취직하는데 그때가 겨우 "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다. 그곳에서 엄마는 새 남자를 만나 그와 재혼한다. 남자는 데몬을 학대 수준으로 다루고, 엄마는 약을 끊지 못한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던 어느 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실신한 엄마를 데몬이 911에 신고한 결과로 사회복지국이 개입한다. 데몬은 남자의 폭행과 학대를 알리지만 복지사는 데몬을 그에게서 분리시킴과 동시에 데몬에게 가장 친밀한 관계였던 페곳 부부 역시 법적 한계로 보호 시설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엄마는 마약 중독 치료 센터로 강제 격리된다. 그렇게 데몬의 위탁 가정 시절이 도래하고,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데몬에게 그 후로도 끝없이 최악은 이어진다.
사회복지국에서 지급하는 보상금에 주된 목적이 있던 위탁 가정들은 하나같이 각종 아동 학대의 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첫 번째 위탁 가정에 위탁된 아동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담배 농장에서 노동에 시달리며 마약에 노출된다. 데몬은 차라리 엄마의 남자에게로 돌아가기를 바랄 지경이 되는데, 열한 살이 되던 생일날에 겨우 스물아홉 살이던 엄마가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다.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의 남자가 데몬의 보호자 역할을 포기하고, 뜻밖에도 페곳 부부 역시 데몬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노년이었고, 그들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형편이었다. 두 번째 위탁 가정으로 재배정된 데몬은 집 뒤쪽에 붙은 개 방에서 세탁기, 건조기와 함께 생활한다. 여기서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식사와 함께 일자리까지 제공된다. 그 일자리라 함은 다름 아닌 쓰레기장이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 더미들에서 쓸 만한 쓰레기를 분류해내는 노동이 매일같이 이어지다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위탁 가정의 파산으로 인해 새로운 배정지를 앞둔 데몬은 탈출을 결행한다. 어린 시절에 엄마와 페곳 부부의 모호한 대화 속에서 이끌어낸 정보만에 기대어 무작정 아빠를 찾아나선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결국 할머니와 대면하게 되는데 아빠는 이미 사망한 뒤다. 바로 여기서부터 데몬 인생 최대의 반전이 시작되는데, 정작 본인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행운을 지렛대 삼을 만한 자아도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행운을 행운으로 믿는 데에는 행운에 대한 경험이 전제된다. 행복이나 행운에 대한 경험 없이는 그 행운이 다하기 전에 믿기 어렵다. 행운이라고 여겼던 순간이 좀 더한 불행으로 돌변하는 생의 농담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경험한 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고 생 그 자체를 믿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사실 부모의 역할은 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서 사랑보다 더 주요하다. 탓을 할 수 있는 어른도 사라지면 나 자신밖에 남지 않으니.
데몬은 "다들 나쁜 영향에 대해 경고하지만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그 사람의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며 안간힘을 쓰지만,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 자신이라는 뜻은 아니다. 닥쳐 오는 생의 물살에 휩쓸려 버티는 데만 주력하자면 거기 나는 없다. 있다고 믿는 나는 다만 믿고 싶었을 뿐 실은 내가 아니다. 자기 믿음은 훨씬 더 많은 사랑과 희생을 요구하는 다른 차원의 결과물이다. 성장기가 중요한 건 바로 이 지난한 결과물을 가장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믿지 못한다면 행운도 차악에 불과하다. 우리가 평생토록 사랑에 갈급하는 건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자기 믿음을 향한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다른 회복력과 통찰력으로 점차 삶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데도 번번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하는 데몬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다시 한 번 사랑이 제시되는 건, 900페이지 넘는 시간들을 건너는 동안 처음부터 줄곧 견지해온 작가의 주제 의식의 발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