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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임지은 시집 / 민음사

by 글섬


시 읽고 웃어도 되나?

시집을 읽다가 이렇게 여러 번 웃어본 기억이 없다.

도대체 뭐냐, 이 시인.



신문에서 처음 이 시집의 소개글과 함께 몇 줄의 시구를 읽었을 때, 이건 무조건 사야겠다, 싶은 강한 끌림이 있었기에 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간만에 콩딱콩딱 그랬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시집 구매가 대략 삼백 년쯤 만의 일인 지라

요즘에도 누가 시를 쓰고 사나, 싶을 지경이었는데

시만 쓰고 사는 시인의 내공이 감탄스럽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는 기도했다 열심이 대충의 외피를 입기를, 3월이 아프지 않고 4월이 되기를, 보통이 보통에서 멈추기를


- <기본값> 중에서



크리스마스로 시를 쓰기로 했다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선물이 되고 싶었다

불 꺼진 백열전구처럼 나를 걸어 놓았다


- <크리스마스로 시 쓰기> 중에서



행복은 복합터미널 같아서

부산행 버스처럼 직접 찾아서 느껴야 합니다

간혹 부산행 버스가 당신 앞에 와서 서는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은 드물고


1번 플랫폼 옆이 2번이 아니라 왜 13번인지

당신이 알았던 것들이 소용없어지고


당신이 탄 버스가 부산행이라는 믿음만이

당신을 부산으로 데려다줍니다


행복엔 잘잘못이 없고 계속하면 됩니다


-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2> 중에서



뾰루지가 나서 피부과에 갔다

압출기로 짜내고 레이저를 쐬면 감쪽같을 겁니다


당신은 지워지고 뽀루지만 남을 거예요


침대에는 상처만 남은 사람들이 누워

존재감마저 지우고 있었고


*


이대로 두면 난폭해질 게 분명해


아이에게 빨간색이 묻었다고 믿는

여자는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다


빨강에 노랑을 섞으면 오렌지가 되고

파랑을 섞으면 순응이 되지


여자는 파란색을 가져오기 위해 매를 들었다


새파래져서 아이는

드디어 새파래져서 아이는


- <결말들> 중에서




예스럽게 재산 목록 1위 같은 걸 꼽자면 단연 도서, 음반 들인데도 더 이상은 지인들 선물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선물을 고를 때마다 슬픈 1인인데.

게다가 시집이라니.

그런데도 아끼는 누군가에게(있다면 말이다) 온 마음이 담긴 선물로 건네주고픈,

사는 동안 뭐 별로 만나본 적 없는 그런 시집이다.

이제야 철이 든 겐지 태어나 처음으로 시집 값이 왜 이리 싸누, 싶기도 하고

이렇게 많은 단어들을, 이렇게 많은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 들을 껴안고 밤낮없이 토끼잠을 자며 쩔쩔매었을 시인이 생애 처음으로 안쓰러워, 이젠 선물로도 안 되는 시집인데, 나라도 한 권 더 사주까, 싶은

아주아주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인, 그런 시집이다.





토끼는 똑똑 떨어지는 잠의

물방울을 맞으며 두 눈이 빨개졌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렸을 뿐인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겼고

그게 나를 조금 망가뜨린다 해도 어쩔 수 없죠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몸과 달라

바늘로도 꿰매지지 않아요


잠이 새어 나가고 있습니다

귀가 뾰족한 생각 밖으로요


- <토끼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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