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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ul 10. 2024

나만 있는 세상

그녀 이야기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걸어서 집에 가는 길이라는데 목소리가 턱없이 크다. 취한 게다. 낮동안 더러웠던 기분을 선배들과의 술자리로 풀어 보려던 시도가 실패했는지 취해서 더 기분 나쁜 목소리다. 아, 낮에 카톡으로 말하다 말아서 궁금해할 것 같아서,라고 시작했지만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심지어 완전히 잊고 있었다. 퇴근 전까지 완료했어야 할 일들에 종종댔던 하루였고, 저녁을 먹기 무섭게 몰려든 집채 만한 피로에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응, 그래, 라고 응하며 비스듬히 누워 반쯤 졸고 있던 자세를 고쳐 세웠다.


그녀의 사설은 이러했다. 전사 차원의 감사 대응에서 후배의 사소한 보고서 실책이 발견되어 그녀와 둘이서 보고서를 살짝 손봤다. 그런데 뒤늦게 손본 보고서는 전체 흐름과 맞지 않았고, 결국 보일락 말락 했던 작은 흠을 가린다는 게 누가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결함을 초래하고 말았다. 책임을 가리는 과정에서 파트장이 다른 파트의 결함을 애써 걸고 나섰다. 다른 파트와 책임을 나눠지면 그만큼 패널티를 덜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때 아닌 정의감이 치솟다 못해 인간 혐오가 올라왔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사랑 고백이 어졌다.

야, 너 같은 인간만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한없이 정의롭거나 턱없이 순수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편을 들어줘야 할 것만 같아진다. 취중 그녀는 무한 반복을 시행한다. 야, 너 같은 인간만 사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야, 너 같은 인간만 있는 세상 말이야아.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욕 같기도 하다. 취기 탓이겠지... Anyway,


이 얘기를 방금 전 술자리에서 나눴는지 묻자, 소속 파트의 치부라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처치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그뿐이다. 혼자라는 건 그런 거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은 가지치기 없이 저 혼자 무럭무럭 무턱대고 자란다. 처음엔 그저 이래도 되는가 싶었던 죄책감과 부끄러움이었을 감정이 아무도 나눠주지 않았던 탓에 혐오로 곧장 직진했다.


나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한테 미안한데 나라도 그렇게 했을 듯해. 너와 후배는 개인의 책임만 살핀 거지만 파트장은 파트원 전체의 책임을 고려해야 했을 테니 당연히 책임을 덜하는 쪽을 택했던 거고. 너나 후배나 사실 죄책감 뒤로 숨은 거잖아. 하지만 파트장은 그럴 수 없지. 그런 게 진짜 책임이란 거지. 실은 너도 알고 있었지?


밤거리의 숨어 울던 매미까지 죄다 놀라 자빠지게 해버리겠다는 결의인 냥 우렁찼던 그녀의 목소리가 살포시 내려앉더니 야, 생각해봤더니 너만 있는 세상도 별로다 야. 너도 나만 있는 세상은 별로잖아, 그치? 우리는 빵 터져 까르르 웃어댔다.


전화 너머로 현관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강렬한 경고음이 들린다. 다시 누르는 소리와 경고음이 두 번 더 반복되더니 그만 강력한 사이렌 소리가 터져 버린다. 다급히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찾느라 황망해진 그녀가 민망한 어투로 킬킬대며 말한다. 이쯤되면 내 현관 비번을 내가 모르는 걸 거야. 그치? 비로소 사이렌 소리가 멈추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가 술이 다 깬 목소리로 외친다. 피곤했을 텐데 들어주느라 애썼다 야. 이제 자라아.


여태 저 혼자 떠들어대던 티비를 끄고 잘 준비를 하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솟구치는 그녀의 정의감이 예쁘다. 불의를 보고 타협하기 전에 주춤하게 되는 망설임이 부럽다. 나에게 배당된 불이익을 타인에게 분배하겠다는 유익한 결정에도 안도 대신 술이 필요한 열정이 아름답다. 바로 젊음 말이다. 그녀가 옳았다. 나만 있는 세상도 그녀만 있는 세상도 다 별로다. 각자 저만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옹송그리느라 여기저기 부지불식간에 일그러지는 세상이지만 그러느라 아름답고 살 만해진다. 가지치기 없이 혼자 두면 쓸데없이 무럭무럭 자라 위험해지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른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서 이만큼이라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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