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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ul 07. 2024

미오기전

김미옥 지음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때마다 나는 과거를 불러 화해했다.

쓰고 맵고 아린 시간에 열을 가하자 순한 맛이 되었다.

나는 술래잡기하듯 아픈 기억을 찾아내 친구로 만들었다.

내 과거를 푹 고아 우려낸 글, '곰국'은 이렇게 나왔다.


책 제목은 [미오기전]이지만 시간순으로 쓴 글은 아니다.

말하자면 통증 지수가 높은 기억의 통각점들을 골라 쓴 점묘화다.


- 프롤로그 중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서 처음엔 빗소리인 줄 알았다. 울음소리가 가슴을 짓눌러 눈물이 고였다. 일어나니 머리가 긴 젊은 여자가 이불 보따리 위에서 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네가 이사를 가면 자기는 또 혼자라고 했다. 네가 있어 그동안 즐거웠고 행복했다는 것이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다시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녀를 이불처럼 눕혀서 다시 보따리를 쌌다. 같이 가자.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다. 누군가 울면 가슴부터 미어졌다. 혼자 우는 눈물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가끔 무방비가 되어 버린다.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우는지가 중요했다. 나도 누군가 왜 우는지 물어봐줬으면 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 타인의 흔적 2 / 오! 나의 귀신님 중에서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일반인의 에세이는 읽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문장이 아름답지 않아서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 같이 저 사는 얘기 일색인데 누구나 사는 건 힘든 법이다 보니 소재와 인물 캐릭터의 빈곤함에 나까지 가난해진다. 생각이 끊긴다. 사고나 가슴을 확장시키지 못하는 예술은 글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무의미하다는 게 나름의 지론이다.


신문 주말 섹션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이 시선을 끌었다. 이제부터 에세이 작법은 이 책의 전과 후로 나뉠 거라고.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리 비범할까.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책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좀 과도하게 비범하다.

SNS 매일 업로드 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니 만큼 겨우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이지만 글의 구성도 문장 흐름이나 가독성도 좋다. 에세이 특유의 짤막한 문체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으로 빚어낸 위트 가득한 문장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지독한 성실함과 다독으로 다져진 글쓰기 근력으로 곳곳이 촌철살인이다. 과연 서점가에 흔한 에세이들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다만, 어려운 시절들을 모아 "곰국"을 끓여 화해했다는 표현은 잘못되었지 싶다. 저자가 극심했던 유년시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저자의 표현처럼 "힘들 때마다 삶의 매운맛을 소환해내 화해"를 해서가 아니다. 특유의 고집과 집중력으로 고통을 정면돌파했기 때문이고, 그 결과 '한강변 아파트'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어려움과 화해할 수 있는 법은 없다. 정말 화해했다면 소환도 곰국도 필요없다. 안녕, 그뿐이다.


이 책의 아쉬움은 그뿐이다. 저자는 너무도 보란 듯이 이미 성공한 상태였고, 그건 이미 비범한 생이라 에세이라기보다는 SNS에 보기 좋게 업로드된 사진들 같다. 도서 추천 글처럼 고난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게 아니라, 고난이 웃음이 될 만큼 성공한 게 핵심이다.


짧은 글인데도 개연성과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에세이이긴 하지만 역시 책을 덮으면 더 생각할 아무것도 없다. 남달랐던 유년의 고통을 실질적 성공과 현란한 필력으로 '승화'해낸 고난도 기술이 가능하다면, 이제 '곰국'을 완탕했으니 완전히 낯선 세계로 진입할 잠재력도 충분해 보인다. 필력이 남다른 저자가 소설로 정면승부하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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