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그리운 맛이 있다. 아빠는 새빨간 홍시를 보면 어린 시절 마당의 감나무 아래에서 뛰놀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하고, 엄마는 젓가락에 돌돌 말린 낙지 호롱이를 보면 삼천포 할머니의 손맛이 느껴진다고 한다. 오빠는 흰쌀밥에 김 한 장을 곁들여 먹을 때면 엄마의 따뜻한 밥상이 떠오른다 했고 올케는 직사각형 모양의 컵라면을 보면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 갔던 신나는 여름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나에게도 그런 특별한 음식이 있다. 바로 전주의 명물, 풍년제과 초코파이.
부드러운 생크림과 달콤한 초콜릿이 조화를 이룬 그 맛은, 나에게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선 무언가이다. 풍년제과 초코파이만 보면, 마치 영화 필름이 스르륵 감기듯 자연스럽게 H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4년 전 즈음,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직장 동료가 전주 여행을 다녀오면서 풍년제과 초코파이를 맛보라며 하나씩 나눠줬다. 유명세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작 맛을 본 적은 없어 몹시 기대됐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더 맛있다고 해서 차분히 굳어가는 초코파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고되었던 게 생각난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집에 가서 먹어야지' 이 생각으로 그날 하루를 버틴 것 같다. 한참 직장이 바쁠 시기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지만 온통 머릿속으로는 '초코파이 초코파이'밖에 없었다. 퇴근 후 맛볼 생각에 흥분돼서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는데,
아 참, 집에 H가 있구나.
나눠먹어야겠네? 씨이이이이발?
좀스럽게 혼자 먹지는 못하고, 두 눈 뜨고 살아있는 H를 못 본 척할 수 없어 예의상 함께 먹지 않겠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와 함께, 단 걸 먹으면 이빨이 썩는다를 시작으로 생각보다 별로일 수도 있다, 이걸 준 동료가 평소에 나를 싫어해서 분명 초코파이에 이상한 짓을 했을 수 있으니 찝찝하지 않느냐의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깔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년은 굳이 먹겠다고 했다.
그래. 이 년아. 같이 처먹자.
안 그래도 작은 초코파이를 둘로 나누는 순간, 내 마음도 두 조각이 났다. 더 큰 조각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과 친구와 나눠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우정보다 식탐이 더 컸나 보다. 작은 쪽을 건네며 괜히 쿨한 척했지만, 다 먹고 싶은 못난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을매나 맛있을까. 오랜만에 먹는다며 좋아하는 H의 모습을 보니 나눠먹기를 잘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했다. H가 먼저 게걸스럽게 먹는 걸 보며 정말 저렇게 맛있을까 너무 설레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전주 필수 먹방템이라는 말이 있을까. 사실 나는 지역 맛집이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미디어와 입소문이 만들어낸 허상 같은 느낌이랄까. 사람들이 극찬하는 맛집이라도 막상 가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절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초코파이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어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글쎄,
흠. 그냥 아는 맛이네?
아는 초코빵과자맛이네. 에이. 역시나 예상했던 맛이라 너무 기대한 게 허무한 느낌이었다.
근데 여러 입을 베어 물수록
맛... 맛있잖아? 존맛탱.
입에 착착 감기는 이 느낌! 먹다 보니 멈출 수가 없네!
그날은 직장 스트레스로 내 혀가 피곤했는지, 달달한 초코가 혀에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었다. 이건 전주의 맛이 아니라 카카오 농장에서 갓 수확한 듯한 싱싱한 농부의 달달한 땀맛이었다. 나의 벌어진 치아 사이에 콕콕 박힌 초콜릿 알갱이들이 혀끝에서 닿이는 순간 전율이 돋았다.작은 크기의 초코과자를 둘이 나눠 먹다니, 이건 정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껴 먹으려고 조금씩 베어 물다 보니 다섯 입 만에 끝이 날 것 같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천천히 음미했지만 금세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맞은편에 앉은 H가 아무렇지 않게 초콜릿과자를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내 안의 짐승이 깨어나는 듯했다. 그녀의 입 안에서 분쇄되고 있을 초콜릿과자를 상상하니까 H의 입에 손을 짚어넣어 다시 꺼내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그 맛은 강렬했고, 양은 부족했다. 양이 적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의 맛은 정말 특별했다.
달콤한 유혹에 사로잡혀 20년 지기 친구의 턱주가리를 날리고 싶은 충동이라니.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음식에 집착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 참고로 그날 난 굉장히 피곤했다. 조금만 더 피곤했다면, 나는 20년 지기 친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 내 그 짐승 같은 마음을 H는 모르겠지?
휴
전주 출신 올케가 이번 명절에 선물로 초코파이를 사 왔다.
아... 쩝쩝거리고 맛있게 먹던 H의 턱주가리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의 짐승 같던 눈빛이 생각난다.
아... 아름다운 추억이여.
이렇듯 음식은 잊지 못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음식이란 참 신비한 것이다. 오랜만에 먹었는데도 여전히 맛있다. 올케가 한 박스 사줘서 다행이다. 우리 가족들 턱주가리는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