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H는 어느 날 인생이 너무 무료하다고 투덜대더니, 갑자기 “체험단”이라는 신세계에 눈을 떴다. 먹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녀는 이미 동네방네 맛집 수집가였기에, 블로그에서 우연히 본 체험단 모집 글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길로 바로 블로그를 개설하고, 그동안 찍어둔 수많은 음식 사진을 차곡차곡 업로드하며 맛집 블로거로의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체험단’이란, 음식점에서 무료로 음식을 제공받고, 그 대신 가게와 음식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은 후 극찬에 가까운 후기를 본인 블로그에 올리는 활동을 말한다.
요즘은 무엇이든 검색으로 시작하는 시대다. 음식점 하나를 가더라도 후기를 먼저 찾아보고, 제품을 사기 전에는 블로그나 SNS 리뷰를 참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많은 가게들이 블로그 체험단을 활용하고 있다. 다양한 블로그에 자주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며 체험단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그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피부 관리나 마사지 같은 서비스까지 제공받는다. 단순히 소비자가 아니라, 작은 영향력을 가진 콘텐츠 생산자로서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허황된 맛집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H는 요즘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체험단 신청을 하고, 잠들기 직전까지도 음식 사진을 편집하며 살아간다. 정말 간절하게, 선량한 자영업자에게 “날 뽑아주세요”를 속으로 외치며.
그러던 중, 친구 H가 마침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샤브샤브집 체험단에 선정되었다. 나도 얼떨결에 함께 하기로 했다. ‘공짜 밥’의 세계가 과연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에 기꺼이 따라나섰다.
오후 1시, H는 미리 음식점 사장님과 약속을 잡아 두었고,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게로 향했다. 체험단이라는 특별한 손님으로 대접받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평소보다 살짝 들뜬 기분이었다. 평범한 외식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줄 ‘후기’를 염두에 둔 자리라는 점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가게 앞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H는 곧바로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밖에 서서 가게 건물 외관을 파파라치 수준으로 엄청 찍어댔다. 부동산 중개업자들도 이 정도로 사진은 안 찍겠다 싶을 정도로 H는 외관에서만 벌써 40장을 찍어댔다. 와, 이년은 진심이다.
H는 체험단 활동을 하면서 가장 민망한 순간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찰나라고 말했다. 내돈내산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공짜밥 먹으러 왔소이다'의 느낌으로 쭈볏쭈볏 헤헤거리며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다고 했다. 그날도 H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마치 사뿐사뿐 들어가는 손님이 아니라 괜히 민폐 끼치는 사람처럼 굽신거리며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개를 아래위로 조심스레 까딱이는 모습이 어찌나 비둘기 같던지.
멋쩍은 얼굴로 체험단이라 말하며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메뉴를 시킴과 동시에, H는 벌떡 일어서서는 가게 이곳저곳을 CSI 수사관 수준으로 자세히, 아주 자세히 찍어댔다. 예전에 블로그에 인생을 건 남자와 소개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음식 나오기 전에 접시 바닥 문양까지 찍는 걸 보고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H는 그를 능가했다. 아니, “저런 것까지 찍는다고?” 싶은 것들—조명등, 가게의 메뉴랑 전혀 상관없는 가게 주인의 장난감들, 주방 입구 앞 작은 화분까지—모두 카메라에 담아내는 집념은 감탄을 넘어 약간의 공포마저 불러일으켰다. 체험단이 아니라 가게 고발을 위한 위생감시단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열정적인 H의 모습에 농담처럼 “그럴 거면 변기도 찍지 그러냐?”라고 말했는데, 그녀가 보여준 가게 네 군데 변기 사진 컬렉션에 말문이 막혔다.
와우
대단하다 정말.
… 이년 정상 아냐.
주문한 샤브샤브 전골이 나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보글보글 끓는 모습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친구 덕분에 따끈한 전골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나도 공짜가 좋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공짜밥 앞에 이 정도 사진 찍는 수고쯤이야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입 떠먹으려는 순간, H가 벌떡 일어나 내 숟가락을 막으며 “사진부터 찍어야 해!”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밑반찬부터 전골 속 파 한 줄기까지 빠짐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아직은 초보 블로거라며,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본인 글을 보고 정보를 얻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뽑아준 가게 사장님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H는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
그렇게 가까이 음식을 찍는 게 가게에 무슨 도움이 되겠니.
핸드폰도 샤브샤브처럼 익혀 먹으실 건가 봐요.
대단해 정말.
어느 정도 사진을 다 찍고 난 뒤 (200장 예상합니다)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지만, 내돈내산이 아니다 보니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적어도 난 그랬다. 왠지 공짜밥을 먹으니 리필해서도 안될 것 같고, 성의 없는 서비스에 불만을 토로하면 안 될 것 같고, 크게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냥 가게 안에서 숨 쉬면 안 될 것 같다 흑흑. 공짜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다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H는 사장님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며
티슈를 뽑아 아주 열심히,
쓱싹쓱싹
신데렐라도 울고 갈 만큼 엄청난 손걸레질.
이럴 거면 그냥 돈 주고 사 먹자 이년아.
공짜밥이 결코 공짜가 아니다.
사장님께 민폐를 안 끼치고 싶으면, 아예 다른 손님한테 서빙까지 하지 그러냐.
대단해 정말.
먹은 테이블을 깨끗이 정리하고는 사장님께 잘 먹고 간다는 말과 함께 우리는 가게를 나왔고,
소름 돋게도
H는 다시 되돌이표처럼 외관을 찍기 시작했다.
2만 원짜리 전골을 공짜로 먹고, 20만 원치 노동을 한 기분이었다.
공짜는 역시… 비싸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체험단도 꽤 괜찮아 보였다. 성의껏 사진 찍고, 내가 느낀 걸 솔직하게 적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H처럼 조명등부터 변기까지 찍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맛집 가서 공짜로 밥 먹고 즐거운 글 하나 남기는 게… 은근히 괜찮은 부업 아닌가?
나도 살짝 도전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 H에게서 카톡이 왔다.
난 그냥 내 돈 주고 사 먹을게.
끗
+
몇 주가 지난 지금, 나와 H는 한 몸이 되어 체험단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 물론 변기사진은 이제 안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