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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졸업해야 할 나이에 음악대학을 자퇴하다

경영 컨설턴트로 은퇴한 음대생 이야기 3. 음악을 포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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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음악대학에 입학했으니 벌써 31년 전의 일이군요.

입학하던 그날 뿐 아니라 신입생 시절 풋풋했던 저와 친구들의 모습이 정말 어제일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죠.

음악대학으로 걸어가는 길 멀리에서부터 벌써 피아노 소리와 관악기의 소리 그리고 성악과 학생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는 정말 하루 종일 음악에 파묻혀서 음악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치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은 기분으로 발걸음에 힘이 주어지던' 그 때의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신입생 환영회다 MT다 뭐다 해서 때로는 신입생으로서 선배들의 '우쭈주'를 때로는 음대의 엄격한 '선후배 규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던 가운데 학교생활을 시작한지 1달도 되지 않아 목에 큰 이상이 느껴졌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음성이상이 발생하다


아니, 나중에 생각해보니 입시를 준비하던 그 때에도 자주 이상이 느껴져서 레슨을 쉬어야 하는 날이 많았었는데 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하루 종일 그리고 일주일 내내 연습을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니 그 문제가 더 심각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병원에 가면 약을 처방해주면서 "2주 정도는 가급적 말도 하지 말라"는 지침을 주었고 저는 한참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신입생 시절, 앞 부분에 X표시를 한 마스크를 끼고 선후배 동기들에게 양해를 구한후 의도치 않게 조용한 신입생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후 한 1~2주 정도는 괜찮았다가 다시 동일한 문제가 생기기를 반복, 그러다보니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죠. (하루 종일 말을 못하게 되니 동기 그리고 선배들과 대화가 어려운데 어떻게 친밀감을 형성할 수가...) 결국 노래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대학생활이라면 오히려 시간낭비가 될 것 같아 학점 2.08이라는 처참한 학점으로 방황의 성악과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입대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도피하듯 군대에 입대를 했지만 군대에서는 목을 더 혹사시킬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조건이라는 점을 왜 그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하긴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군대 문제는 방법이 없으니...)

의정부 306 보충대에 입소를 하자마자 목이 너무 아파서 당시 자원봉사 개념으로 군인들에게 식사 봉사를 해주시던 어느 교회의 어머님께 주변의 눈을 피해 몰래 쪽지를 건네었습니다. (걸리면 그날로 죽음의 군생활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마치 간첩이 접선을 하듯)

"어머니. 저 목이 너무 아파요. 입대 전 먹던 약을 좀 더 처방해서 보내주세요." 이런 메세지와 함께 집 전화번호를 적어서 배식하던 분께 슬쩍 전달을 했던 것이죠.

감사하게도 그분께서 직접 전화를 하셔서 그 메세지를 전달해주셨고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약은 나중에 자대배치 후에 저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자대배치 받고 대대장님께서는 직접 저희 소대에 오셔서 "저 친구는 성악과인데 목을 다쳐서 어려움이 있으니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게 하라"고 지침을 내리셨지만 당시 군대에 열외란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점심저녁 식사 집합을 하면 소대별로 군가를 부르는데 어느 소대의 군가 소리가 작은지를 가지고 식사 전후로 얼차려가 이어졌기 때문에 저 하나의 목소리가 빠지면 그것이 소대 모두의 피해가 될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상병 이하 중간 고참들은 저에게 "성악과 다닌다고 티내냐? 죽여버리기 전에 목소리 더 크게 내라"며 갈궈댔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나 하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결국 제 목소리는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습니다.


전역과 함께 목을 수술하다


이렇게 총 26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1995년 6월, 전역을 하자마자 그당시 '음성' 분야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다고 불리우는 영동세브란스병원(현 강남세브란스)의 최홍식 교수님께 검사와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 11월쯤 목의 근육을 떼어 붙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이런 시도는 당시 국내에서 처음 진행하는 시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수술을 마치고 몇개월 후인 1996년 3월, 2학년으로 학교에 복학을 하며 재활과 학교 생활을 병행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복학은 했지만 '재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시 신입생 시절처럼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상태로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죠. 또 그 암담한 생활이 연장되어야 했습니다.  


※ 복학했을 때 95학번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세계적인 테너로 성장한 박지응(Rudy Park)군도 함께 수업을 듣던 후배였습니다. 한 외국인이 편집한 세계 최고의 Nssun Dorma를 부르는 14명의 테너로 소개한 영상에도 등장합니다. (2분경 등장합니다.)


성악과에서는 1학년과 2학년 때는 이탈리아, 독일가곡 중심으로 학업을 진행하고 3학년부터는 이제 오페라 아리아가 진행되는데 학기에 한 번 발표하는 실기시험에서도 3학년때부터는'반드시' 오페리 아리아가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가곡의 경우는 음을 좀 낮춰 부르는 것이 허용되는 반면, 오페라 아리아는 반드시 원키로 불러야 했기 때문에 제 목의 상태가 아무리 정상이 아니어서 고음을 낼 수 없다고 해도 망칠 때 망치더라도 음을 낮춰 부를 수 없다는 점이 매우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3학년 1학기 실기시험 겸 연주회 날이 다가왔고 저는 성악과 학생 160명이 모여있는 곳에서 가곡1곡과 오페라 아리아 1곡을 불렀습니다. 

2학년 때까지는 연주가 끝나면 선후배 및 친구들이 찾아와서 "재활 잘 하면 잘 될 수도 있겠다. 가능성 충분해!", "너 노래하는거 처음 들었는데 이럴 줄 몰랐다"며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3학년 실기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도저히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노래를 불렀네요.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에서도 그냥 멈추고 내려갈까를 고민했을 정도였으니...

어찌어찌 끝까지 노래를 마치고 사람들의 얼굴을 대할 용기가 나질 않아 음대 연습실 가장 구석에 방 하나를 잡아놓고 밤이 될때까지 숨어서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 했습니다.


음악대학을 자퇴하다


너무 처절하고 너무 자존심 상하고 너무 창피하고...정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란 생각은 다 안은 채로 아무도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잠궈놓고 하루 종일 괴로워했었죠. 그때 결심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절대 될 수 없는 일 보다는 노력하면 가능성이라도 생길 수 있는 일을 하는게 맞지 않겠나?"

그래서 그 길로 자퇴를 결심하고 1997년 6월,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저의 음대생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제 재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입시 시절 저를 레슨해주시던 선생님께서는 레슨비도 받지 않고 3학년때까지 오랜시간 저를 지도해주셨고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이 있었는데 그분들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으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큰 벽 앞에서 결국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음악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정을 한 것이 1990년 10월쯤이었고 1997년 6월 자퇴를 하기까지 7년이란 시간을 음악만 생각하고 살다가 갑자기 다른 일을 하자고 결심을 하니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는 이미 26살이나 먹어버렸지 할 줄 아는 것은 없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시절에는 '나이제한'이 분명해서 군필 남자는 대학교 졸업하고 늦어도 28세 정도까지 회사 입사를 못하면 거의 모든 기업의 입사 기회가 박탈되는 시기였죠.)

진심으로 "시장에라도 나가서 일을 배울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 이래저래 고민을 하던 차에 아버지께서는 기술을 배우라며 공덕동에 있는 기능대학(현재 한국 폴리텍대학) 입학 원서를 갖다 주셨고 저는 그 입학원서를 써서 원서접수 마지막날 원서를 들고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학교 앞에서 한참동안 "나에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 원서를 제출하면 내 앞으로의 인생 경로는 이쪽 방향으로 결정이 되는거다. 자신있나?"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던 것 같습니다. 기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개념이 없는데 쫓기듯 이렇게 내 삶의 방향을 아무것도 모르는 더구나 관심도 없는 쪽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인가를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원서를 제출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딱 3개월만 고민의 시간을 좀 가져보자는 차원에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제게 굉장히 큰 변화를 준 계기가 됩니다.


당시 인사동에 있던 선경건설(지금의 SK건설) 본사 RTT팀이라는 곳에서 팀원들의 심부름을 해주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면접을 봤는데 제 이력서에 '음악대학 성악과'라고 써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후보자들 가운데 저를 선택해주셔서 아르바이트생으로 1997년 7월쯤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당시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들을 채용하여 팀원들의 업무 서포트를 담당하는 직무로 직원들을 배치했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뽑히게 된 RTT팀은 태국의 RTT공사현장을 일정기간 담당하게 된 '프로젝트팀'이라 정규직 여직원을 배치할 수가 없어서 팀 자체의 비용으로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뽑아서 일을 맡긴 것이었죠.


해외 플랜트 사업팀이다보니 문서들이 영어로 된 것이 많았습니다. 물론 아르바이트생에게 영어를 알아야 하는 일까지 맡기지는 않았지만 이걸 알면 일하기 더 쉬운 것은 사실이었죠. 일 맡기는 사람 입장에서도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으니 편할거구요.

하지만 저는 1991년 학력고사 이후로 그때까지 영어를 쳐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어 이탈리아어는 공부했을 지언정 영어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어서 해외에서 팩스가 오면 거기 써있는 이름만 보고 담당자에게 전달해주기에 급급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편입학 준비를 시작하다


그런데 어느날은 '팩스가 오면 그냥 한 번 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내용을 한 번 읽어봤습니다. (글자를 한 번 쳐다봤습니다가 맞겠네요^^;;)

Regarding...으로 팩스의 내용이 시작되는데 regarding이 뭔지 모르겠는거에요.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regard라는 동사에 -ing를 붙인거라는...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문장이 동사+ing로 시작하지? 명령어라면 그냥 동사여야 하는거 아닌가?"

너무 궁금해서 당시 팀의 막내였던 대리님께 물어봤죠. 그 분이 인도네시아에서 중~대학교를 나오셔서 영어를 잘하신다고...

뭐라뭐라 설명을 해주셨는데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설명해주시는 분도 제가 잘 못알아듣는걸 눈치 채셨는지 "괜찮아. 아마 네가 일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거니까 주눅들지마."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 순간 뭔가 공부에 대한 욕구가 확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내가 비록 아르바이트 일을 하지만 이 작은 일에서도 좀 인정을 받으려면 내용정도는 좀 알고 일을 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거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회사에서도 권장해주셨음) 정말 오랜만에 공부를 하면서 "내가 비록 26.5세의 나이지만 공부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죽을만큼 노력하면 어느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겁니다.


그렇게 저는 1991년 학력고사를 끝으로 접었던 공부를 1997년 10월쯤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학력고사를 준비하게 돠면 준비에 최소 1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만약 합격한다 하더라도 1학년으로 입학하기에는 졸업 후 취업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이듬해에는 바로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편입학'을 선택하였습니다.

비록 그 결심으로부터 편입학 시험까지는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짧은 시점이었지만 꼭 좋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일단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라는 생각으로 편입학 준비에 뛰어들게 되었죠. 


처음 편입학 학원에 등록하면 해당 월에 처음 등록한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기초 시험을 보는데 저는 10월에 등록한 80여명의 학생들 중 뒤에서 두번째의 암담한 결과를 받아들었습니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중학교 2학년 정도 수준이라는 답변을 하시더라구요.

하긴 고등학교 때 알던 영어단어들도 학력고사 이후 5~6년이 지나면서 다 잊어먹었으니 중2 수준의 영어실력이라는 것이 저 스스로도 인정이 되었지만 편입학 시험을 치르려면 최소한 VOCA 10000은 떼야 한다는 소리에 '남은 시간은 4개월인데 이것도 포기해야 하나?' 또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저에게는 하루를 다른 사람들의 한달처럼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고민을 할 시간이 없이 그냥 밀어 붙이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죠.

이렇게 저의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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