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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뺑그이 Apr 20. 2023

난 백씨가 맞는 걸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였다.


아이들은 집단 최면에 걸린 신도들처럼 그 노래를 중얼중얼거렸다. 역사에 관심도 없던 녀석들이 갑자기 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똥멍청이들이 4절까지 다 외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생님들의 특징과 애들 별명으로 개사를 해서도 불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방송가 연말 시상식에도 'KBS, MBC, SBS를 빛낸 100인의 방송인'이라는 자막과 함께 턱시도를 입은 남자와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나와 그 노래를 개사해서 불렀다. 개그맨들도 웃기게 개사해서 개그 소재로 활용했다. 하여튼 온 나라가 그 노래를 중얼중얼거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던 때였. 아니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점점 지긋지긋해졌다.  안 그래도 그 노래가 지겨워 뒤지겠는김지호, 박동수 그리고 정상훈 이 세 명이 그 노래를 빌미 삼아 내게 시비까지 걸었다.


"야, 뺑그이 니는 쌍놈이다."


김지호가 말했다.


"맞다. 백씨는 쌍놈이다."


박동수가 말했다.


"맞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 씨는 한 명도 없잖아. 그러니까  씨는 쌍놈이다. 하하하!"


정상훈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100인의 위인에 백씨가 한 명도 없는 걸까? 난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가사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다가 4절까지 다 외우지도 못할뿐더러 뒤져본다 한들 방대한 가사의 늪에 날이 먼저 저물어 버리겠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그리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씨 위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을 가진 위인이  명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면 잘난 느그들 집안에는 유명한 사람이 누가 있는데?"


내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김해 김씨다. 김수로왕 모르나? 그리고 김유신 장군도 있고 우리 집안은 양반보다  높은 왕족  집안이다. 왕족! 으하하하!"


김지호가 우쭐하며 말했다.


"김유신이 ! 하는 사람인데?"


김지호는 공부를 못해서 답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신도 모르나? 신라 장군이다. 말 목 자른 사람이다이가. 니는 그것도 모르나?"


"와, 억수로 나쁜 놈이네. 불쌍한 말 목을 왜 자르노. 내가 느그집 복실이 목 자르면 니는 기분 좋겠나? 순 나쁜 놈이네."


"뭐라카노! 잘라야 될 이유가 있었겠지. 느그  조상 중에 장군 있나? 있으면 대 봐라! 백씨들은 김유신 장군 제일 밑에 들이었겠네. 하하하!"


난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밀양 박씨다. 우리 박 씨도 조상이 왕이다. 박혁거세다. 알에서 태어난 왕이다!"


박동수가 우쭐하며 끼어들었다.


"알에서 태어나면 그게 닭이지 사람이가. 그래서 니가 닭대가리네. 으하하하!"


"뭐라카노!"


"그러면 사람인데 알에서 왜 태어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무튼 왕이다. 느그 조상들박혁거세 궁궐에서 똥 푸는 마당쇠였겠네. 씨 왕 이름 대 봐라! 으하하하!"


난 또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나주 정씨다. 우리 집안에는 그 사람 있다. 정약용 억수로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다."


정상훈이도 합세했다.


"근데 니는 왜 돌대가리고. 니는 느그 집안에서 돌연변이네. 으하하하!"


"니도 공부 못하잖아. 돌연변이 반사!"


하긴 정상훈이나 나나 공부는 도긴개긴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유명한  위인이 갑자기 떠올랐다.


"맞다! 백씨도 유명한 위인 있다. , 이제 생각났네. 하하하!"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있는데 그게 누군데?"


김지호, 박동수, 정상훈 셋이 동시에 말했다.


"백범김구!"


셋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백범김구? 김구가 백씨였나? 그리고 이름 네 글자가 어디 있노!"


"박혁거세도 네 글자잖아 바보야. 선우용녀도 네 글자고 을지문덕도 네 글자고!"


"아닌 거 같은데 김구는 그냥 김구 아니가? 백범은 이름 아니다. 이름 앞에 붙이는 별명 같은 거다."


정상훈이 반박했다.


"뭐라카노! 그러면 니는 돌대가리정상훈이가. 으하하하!"


그렇게 우리는 한참 설전을 벌였고 백범 김구는 김 씨로 판명이 났다. 난 씩씩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


"와?"


"우리 집이 쌍놈 집안이가?"


"뭐라카! 우리가 와 쌍놈 집안이고 우리 집은 양반 집안이다."


"근데 왜 유명한 사람이 하나도 없노."


아빠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유명한 위인을 떠올리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누가 그라드노? 씨가 쌍놈 집안이라고!"


"내 친구들이 그 김지호, 박동수, 정상훈 셋이서 그랬다. 걔들은 같은  유명한 사람들 다 있던데 우리 백 씨는 왜 하나도 없노!"


"친구들이 쌍놈일 가능성이 높다! 왜인 줄 아나?"


"모르겠는데? 왜?"


"원래 옛날에는 열에 아홉은 성이 없었다. 밥 많이 먹으면 먹쇠 힘이 세면 돌쇠 키가 면 꺽쇠 그냥 누렁이 검둥이처럼 개이름 짓듯이 막 그냥 름을 지었는데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족보를 샀다이가. 그때 제일 인기 많은 성이 김씨라 씨. 너도나도 이제 세련된 김씨 성 가졌다고 좋다고 했겠지. 그래서 지금 김씨가 제일 많은 거다. 그다음 인기 많은 게 이 씨 그다음이 박씨, 최씨 뭐 이래 쭉 입맛대로 성을 골랐는기라. 백씨는 왕족도 아니고 하니까. 크게 인기가 없는 성이었겠지. 근데 씨는 확실히 양반 집안이 다. 우리 조상도 성이 었으면 아마 세련된 김씨 이씨 이런 거 샀을 거고 그러면 아마도 지금 니 이름이 김뺑그이 이뺑그이 그랬겠지. 인자 이해가 좀 되나? 백씨들은 오리지날 양반인기라."


"아...... 우와! 그러면 우리는 확실하게 쌍놈이 아닌 양반인 거네?"


"그렇지 그렇지. 니는 수원 백 시랑공파 37대 손이. 알겠나? 그리고 씨는 수원 백씨 하나다. 파가 많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백씨는 다 일가친척인기라."


"어? 그러면 아 글씨! 오빠가 있다. 백일섭 아저씨도 우리 친척이가?"


"그렇지 친척이지. 친척이.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이 벼슬도 많이 하고 주요 관직에 몸담은 분들도 많다. 그러니 누가 뭐라 캐도 백씨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알겠나?"


"어, 알았다. 알았다. 오야르!"


그 후로 김지호와 박동수 그리고 정상훈을 마주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느그들은 돈 주고 산 짜가리 양반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진까리 양반이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 양반이 판친다. 이히! 으하하하!"


"알았다고 그만해라. 미친놈아!"


내가 지겹도록 놀리니 셋은 내게 쌍놈이라고 놀린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김지호! 니는 밥을 많이 먹으니까 먹쇠라고 불러야겠네. 먹쇠야 저기 가서 물 좀 떠 오너라. 안 가느냐? 너  곤장 맞고 싶은 게냐? 으하하하!"


"박동수 니는 키가 크니까. 꺽쇠라고 불러야겠네. 여봐라 네 이놈 꺽쇠. 저기 산에 가서 땔감 좀 꺾어오너라. 연못에 숨어서 선녀 목욕하는 거 훔쳐볼 궁리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와야 하느니. 으하하하!"


"정상훈 니는 말이 많으니까 앞으로 촉새라고 불러야겠네. 여봐라 촉새야. 입에서 똥꾸릉내가나니 개울에 가서 이 좀 닦고 오너라. 으하하하."


먹쇠, 꺽쇠, 촉새 세 놈은 검지를 귀 옆으로 빙빙 돌리면서 웃고 있는 내게 미쳤냐 수신호를 했다.




예전을 추억하며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선조가 돌쇠였는데 김, 이, 박, 최, 정는 너무 티가 나니까 교묘하게 백씨 성을 가졌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대적인 호적정리 기간에 그냥 뭘로 하지 하다가 그냥 모시던 양반인 백씨 성을 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후손이 맞는 걸까?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이상 밝힐 길은 없다.


백성의 90프로는 성이 없었고 김, 이, 박, 최, 정씨 같은 왕가, 양반의 성은 더 희박해야 정상인데 지금은 제일 흔한 성 씨들이 되었다. 생판 남인 조상을 내 조상으로 내 시조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제와서 그런 게 살아가는데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코미디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혹시나 성도 이름도 없 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내 조상들이라면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드리고 싶고 감사하다는 말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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