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구룬파 유치원”
김광영인문학연구소공감 [그래도 괜찮아]
그림책 읽기 수업 후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90년대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벌어져 상위 1%가 하위 99%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일반 서민이 이 사회의, 나라의 주인이라는 제도인데 자본주의는 자본의 논리를 우선으로 하다 보니 국가의 주인인 서민을 쫓아내는 제도다. 즉, 재개발의 경우 분담금을 내지 못하는 원주민은 쫓겨난다. 그래서 재개발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서민은 강제로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까지 받는다. 그러다 자신이 평생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부산에서 ‘물만골’이라는 곳이 그렇다. 물만골 달동네 아래로는 50층짜리 신식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자본주의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위계 지우 지며 공존하는 참 희한한 괴물이다.
물만골 달동네까지 재개발붐이 일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쫓겨날 위기에 놓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봉사와 연대로 겨우 지켜냈다고 한다. 지금은 생태마을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그곳에 뜻있는 사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인문학연구소 공감’이 탄생했다. 이 인문학연구소 공감에서 성인을 위한 그림책 읽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첫 수업의 그림책은 니시우치 미나미 작가의 ‘구룬파 유치원’이었다.
성인을 위한 동화도 아니고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다. 조금 유치하고 빤한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 어린이들이 이 그림책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많은 동화나 그림책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읽고 느껴야 하는 책이다. 그래야 현실이 조금은 바람직하고 정의롭게 바뀔 테니까.
코끼리 구룬파는 어딜 가도 적응을 못하고 뒤떨어지는 왕따이다. 점점 자신감을 잃은 구룬파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친구들이 이런 구룬파에게 자신만의 동굴에서 나오라고 손을 내민다. 겨우 동굴에서 나온 구룬파는 여기저기에서 일을 한다,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과자를 크게 만들고 신발을 크게 만들고… 자신의 몸집만큼 크게 만드니 어디에도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또 일하던 곳에서 잘린다. 그러나 끝내 자신만의 유치원에서는 구룬파가 만든 큰 물건들이 아이들과 아이의 부모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구룬파는 매우 행복해한다. 구룬파만의 특징이 어떤 곳, 어떤 아이들에게는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떨어진 자신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주위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구들의 용기를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을 내미는 격려일 것이다. 굳이 연대라는 거창한 말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같이 가야 한다. 우리 사회를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가.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으나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같이 가야 이 사회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품처럼 우리의 교육은 천편일률적이다, ‘4지선다’에서 ‘5지선다’로 바뀌었을 뿐 누가 잘 찍는가 여부로 우열을 가리고 서열을 매긴다.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 어린이들이 온갖 탈법과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SKY대학에 가려고 하고 이런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서열과 계급이 정해진다.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온갖 불법과 살벌한 경쟁만이 난무하는 정글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글을 쓰고 물건을 만들고 자신만의 공부를 하게 해야 한다. 물론 공통 필수 과목은 있어야 하겠지만. 이런 자유롭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개성을 가진 구룬파들이 이 사회의 어느 곳에서는 인정받고 같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인 사회인 것이다. 그래야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로 커 갈 수도 있고 사회가 따뜻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책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읽어서 단순히 희망만을 주는 그림책이라는 평가를 넘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바를 읽어내야 하고 우리 사회를 어떤 공동체로 바꾸어야 하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까지 성찰과 비판이 필요한 책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아이들에 구름 잡는 희망만을 선사하는 그림책이 아니라(그래서 희망고문이 아니라) 반드시 어른들이 읽고 반성하고 성찰하고 공감해야 하는 그림책으로서 의미를 부여해야 더 뜻깊은 그림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_ 방정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