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튼 아카데미> 리뷰
100만 7백 44명. 2022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발표한 한국에서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인원수다. 2018년부터 점점 오르고 있는 수치로 미루어 보면 2년이 지난 지금은 더 늘어났을 확률이 높다. 100만 명이라니, 듣기만 해도 절로 우울증이 더 심해질 것만 수치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우울이라는 감정은 더욱 보편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내면의 힐링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확대됐다. 그런데 우울과 힐링은 정말 정반대에 있는 개념일까?
어쩌면 영화 <바튼 아카데미>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영제는 ‘The Holdovers’ 즉, ‘남겨진 사람들’이다. 대다수가 가족, 친구들과 즐거운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는 때에 갈 곳이 없어 학교에 버려지다시피 한 세 명이 주인공이다. 버릇없고 구제 불능인 학생 ’앵거스’, 그런 그를 돌봐야 하는 괴짜 선생 ‘폴’, 이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메리’. 이들의 위태로운 단기 합숙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 ‘제이슨’의 아버지가 몰고 온 헬리콥터를 허망하게 배웅하는 ‘남겨진’ 앵거스와 폴을 하이 앵글로 내려다보는 장면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 세 주인공의 공통점은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만성적인 우울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우울과 고독에 잠식당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들은 다소 사회성이 떨어지며, 괴짜같이 이상하고, 의도치 않은 날카로운 언행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 이들이 2주간 강제로 함께 갇혀 있게 되자 의외의 변화가 생긴다.
특히, 이들이 오랜 시간 붙어있게 되면서 서로의 만성적인 우울을 짐작하게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메리와 폴은 일과를 마치고 메리의 숙소에서 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다. 신혼부부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퀴즈게임 형태의 프로그램인데, 이는 브라운관 너머 두 인물이 앉아 있는 거실로 이어진다. 메리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 관한 아픈 이야기를 꺼내고는 폴에게 결혼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며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 영화 후반부에는 이 자리에 앵거스도 합류하면서 그의 이야기도 차츰 드러난다. 거실 또는 식당에서 폴, 앵거스, 메리가 각자 앉아 있는 거리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가까워지는 점이 이들의 친밀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상처와 결핍이 누적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는 묘한 마력을 지닌 밤의 거실에서조차 폴과 앵거스는 거짓말을 한다. 이후에도 몇 번의 거짓말을 거치고 나서야 그들은 진짜 속내를 털어놓고 비로소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낸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어렵사리 드러내는 타인에게 가여움을 느끼고 이 연민 때문에 마음속으로 견고히 세워두었던 벽이 힘없이 쓰러지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특성인 것 같다. 이는 폴과 앵거스처럼 횡설수설 나불대던 거짓말이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치기 어린 행동이라는 것과, 역설적으로 이 거짓말로 인해 그 결함이 더욱 부각되어 버렸을 때 특히 그렇다. 약점 드러내기는 메리, 폴, 앵거스의 순서로 점점 퍼져가며 서로에게 두터운 연대 의식을 안겨준다. 이 연대 의식은 더욱 좋은 방향으로 확장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위로로 변모한다. 앵거스가 울먹거리며 폴에게 아버지의 병과 그로 인해 불우해진 가정환경,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될까 봐 불안하다는 것을 고백하자, 폴은 그토록 설파하던 고대 격언을 그저 문학적 표현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기어코 ‘우리의 운명이 꼭 과거에만 매여 있는 건 아냐’라며 격언을 부정해 버리기까지 한다. 셋 중 가장 고리타분하던 폴은 결국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조까지 바꾸게 됐다.
이 위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 주인공 모두 서로를 만나기 전엔 인간관계가 거의 단절되어 있었고, 그 원인이 타인에게 겪은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타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애정이 결핍되어 만성적으로 우울과 고독을 달고 사는 이들은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공격성을 띠는 경우가 잦다. 폴, 앵거스, 메리도 처음에는 서로에게 견고한 벽을 친 상태였지만, 서로 진정으로 아파본 인간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우울의 냄새를 맡고 이를 통해 조심스럽게 타인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결국 이는 스스로를 고독 속에 가두던 벽을 깨부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앞서 말한 폴이 앵거스를 위로하는 장면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폴은 앵거스를 위로하면서 그 자신에게도 어떤 충만한 위로가 닿았음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영화의 초반부에 ‘폴’이 교장 ‘우드럽’ 박사에게 비아냥거리며 한 말,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영화 전체를 할애해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 문장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물론, 남들도 나를 도울 수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우울과 고독을 앓고 있기에 서로에게 연대 의식을 느낄 수 있었고 이로써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간 셈이다. 이들의 관계와 위로는 완벽하진 않다. 번듯한 레스토랑이 아닌 주차장에서 볼품없이 만든 체리 쥬빌레처럼, 가족이 있는 따뜻한 집이 아닌 모두가 떠난 학교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했던 허술한 폭죽처럼. 하지만 이 관계는 어설프기에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위로로 완성될 수 있으며, 이는 세 주인공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댈 수 있는 가장 튼튼한 기둥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폴이 소논문을 완성했을지, 앵거스는 무사히 바튼스쿨을 졸업했을지, 메리는 자신의 조카의 대학 등록금을 보탤 수 있을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 서로가 텅 비어있는 새 노트의 첫 단어를 써 내려갈 힘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바튼 아카데미>는 1970년의 미국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 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서 한국 사회의 풍경을 느낀다. 내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등 혼란한 상황 때문에 낭떠러지 직전에 서 있는 듯이 아슬아슬한 1970년의 미국과 청년 앵거스의 모습이 최근 한국 사회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깨달은 것은 우울이라는 감정이 있기에 치유라는 감정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너무 우울함에 찌들어 살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더 맘 편히 살아보기 위해 힐링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우울과 고독이 꼭 나쁜 결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이를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언젠가 온다면 지하에 처박혀 있는 계단을 크게 한 걸음 오를 힘이 분명히 생길 것이라 본다. 우울하고 고독했기에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이 영화가 우울과 고독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조심스럽게 소망해 본다.
영화 <바튼 아카데미>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