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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Feb 09. 2023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빠는 신학생이 되었다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아빠는 논산의 무지렁이 농사꾼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이다. 엄마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놀기 좋아하는 청년 건달이었다. 새파란 나이에 허리 수술을 크게 해서 군대도 못 갔고 술과 담배, 친구를 좋아해 밖으로 돌다가 그림같이 이쁘고 신실한 엄마를 만났다.


아빠가 무능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사실 젊을 때는 우리 아빠도 부실한 몸으로 안 해본 일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첫 직업은 광부다. 아빠와 엄마는 탄광이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충남 논산에서 강원도 사북으로 살러 갔다. 아빠가 막장에서 일하고 엄마가 석탄 먼지 속에 빨래를 하고 밥을 짓던 시기에 내 동생이 태어났다. 석탄 캐는 일이 무슨 돈이 된다고, 오죽하면 막장 인생이라는 말도 있는데… 기술도 배운 것도 없이 촌에서 농사짓기는 죽어도 싫었던 아빠는 험한 일을 하더라도 당장 돈을 손에 더 쥐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막장의 삶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우리가 잠시 사북에 살 때 ‘사북사태’가 일어났고(탄광 노동자들의 집단 시위로 지금은 사북항쟁이라고 부른다) 아빠는 혀를 내두르며 짐을 쌌다.


동생이 세 살, 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인천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아빠는 목수였다. 막노동자라고 하기에는 현장에서 익힌 기술로 나중에 혼자 시골에 집을 지을 정도였으니 실력이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학교에 아빠 직업을 써낼 때 막노동한다고 하지 않고 목수라고 쓰라는 아빠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배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도 목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가게가 딸린 단칸방에 살 때는 우유 대리점을 잠깐 하기도 했다. 말이 대리점이지 아빠는 직원하나 없이 매일 거래처에 우유를 나르는 배달부나 다름없었다. 그다음에는 배달의 기술을 살려 고모부가 하던 서울의 석유 가게에서 먹고 자면서 기름 배달부로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때 아빠는 주말에만 집에 왔다. 가끔 고모가 챙겨 보내는 간식이며 장난감 때문에 나와 동생은 아빠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여동생의 남편 밑에서 머슴처럼 일하는 아빠는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쯤 되었을까. 아빠는 뻥이요를 외치는 뻥튀기 아저씨가 되기도 했다. 하필이면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뻥이요를 외쳐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엄마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아빠가 뻥튀기를 튀기더란다. 마른 강냉이를 넣고 기계를 돌리며 뻥이요를 외치면서 돈을 쓸어 담는 꿈이었댔나. 아빠는 그 말만 듣고 며칠 뒤 진짜로 리어카에 뻥튀기 기계를 싣고 길로 나섰다. 엄마조차 아빠의 행동력에 할 말을 잃었고, 우리 집은 이후로 돈을 쓸어 모은 게 아니라 동전을 쓸어 모았다. 집에 동전이 넘쳤고 매일 저녁 동전을 세는 게 일이었다. 그때 뻥튀기 한 봉지에 얼마였을까? 50원, 아니면 100원이었을 것이다. 뻥튀기 아저씨가 된 아빠가 부끄러워 나는 길을 돌아 집에 갔고, 엄마도 부끄러움에 교회에서 어깨를 펴지 못했다. 허리가 아파 험한 노동을 못하고 진득한 직업 한 번 못 가져 본 아빠가 모처럼 열정적으로 돈을 벌겠다고 길에 나선 것이니 엄마는 말리지도 못하고 속을 태웠다.


5학년이나 6학년쯤 되었을 때 반전이 일어났다. 아빠와 엄마가 번듯한 건물에 세를 내고 성서교재간행사라는 종교서적 출판사의 총판을 연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전집류 도서의 방문 판매가 활발했다. 전집은 비싸기에 할부 판매를 했다. 영업사원들은 이 집 저 집 다니며 책을 선전하고 교육열 높은 엄마들이 자녀를 위해 수십만 원을 쓰도록 만들었다. 웅진 대백과로 유명한 웅진출판사가 지금의 웅진그룹을 만들었으니 전집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 알 수 있다. 아빠는 뻥튀기 아저씨에서 단박에 사장님이 되었고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넥타이를 매고 영업을 다녔다. 엄마도 멋진 투피스에 구두를 신고 열심히 책을 팔러 다녔다. 영업 사원도 여럿이었다. 주종목이 성서교재인 만큼 영업 대상은 목사, 전도사, 신학생, 장로, 권사, 그리고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이었다. 웅진출판사는 전집도서 방판 기술의 노하우를 연장해 웅진코웨이를 운영했다. 정수기를 방판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관리하는 사업으로 확장한 것이다. 우리 아빠는 영업에는 영 소질이 없었기에 사업을 확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사님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신학교 진학을 영업당했다.


그래서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빠는 신학생이 되었다. 총판 사업이 여의치 않아 지자 아빠가 다시 뻥튀기 아저씨가 되는 꼴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던 엄마는 아빠를 기꺼이 신학교에 보낸 것이다. 아빠는 목사님이 되어야 했다. 그건 아빠의 꿈이기 전에 엄마의 꿈이었다. 일 할 수 없는 몸, 연이은 사업 실패, 지독한 가난, 이웃의 멸시와 조롱이 모두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평범하게 살고자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아빠가 하나님의 종이 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이 정한 길을 가면 우리 앞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오더라도 주님만 믿고 가면 이후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끝내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이런 말을 할 때 엄마와 아빠의 눈은 믿음으로 빛났다. 어린 나도 기대에 부풀었다. 우리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천상을 꿈꾸었다.


그전에도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비참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빠가 신학생이 되던 1993년부터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돈을 벌지 않을 이유가 생겼고 엄마는 아빠를 뒷바라지하며 홀로 두 딸을 키워냈다. 이제부터 우리 집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난할 것인데 돈을 벌어야 할 아빠가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때가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때였다. 내 유년 시절이 가난했다면 청소년기는 비참했다. 비참한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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