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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Apr 01. 2023

나로 인해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7)

이제 그만 해방되어도 좋다고

갈등 상황에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스스로에게서 잘못을 찾고 반성하는 것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인격을 수양하는 과정이다. 평소 화가 별로 없고, 감정의 동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 나는 스스로를 성숙한 인간이라 믿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또 원래도 온순한 성격을 타고났기에 인생에 시련이나 고난이 있어도 잘 참아내고, 이겨낼 수 있었다. 나쁜 사람을 멀리하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나쁜 기억은 되도록 빨리 잊었으며,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그들로부터 고통을 겪는 일이 생기면서, 마음이 날로 야위어 갔다. 여유가 사라지고, 점차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차가워졌다. 미안하다고 하면 천하의 쓰레기가 되어 조롱당하거나 박제될 수 있는 게 SNS였다. 도의적인 책임을 지려던 것뿐인데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내 잘못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고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고맙다는 말은 마음의 표현이고, 이런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 주는 것이 좋은 것인데, 고맙다고 해봤자 돌아오는 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맙다고 하면 자기가 정말 뭔가를 대단하게 한 것이라 믿고, 내가 자기에게 신세 진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점차 말을 닫아 버렸다.


내 인격에 기대어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는 사람들이 늘었고, 나는 그들을 어릴 적 내 동생 돌보듯이 돌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나쁜 기억을 잊고 새로 시작하려고 작정하면 또 나쁜 일이 생겼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큰 나쁜 일이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쁜 일들도 벌어졌다. 이를 테면 형사 재판에 피고로 서게 되는 일 같은 것도 생겼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사람 중에는 실제로 정신병을 앓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들 대부분이 나보다 한참 어렸고 불안정했다. 어릴 적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엄마가 아니었지만 가끔 엄마처럼 행동했다. 그들이 나를 공격할 때 맞서서 싸우면 내가 이길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상대가 죽을까 봐 겁이 났다. 내가 공격하면 상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근거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대부분 싸움을 회피하고 손해를 봤다.


결국에 화병이 나고 말았는데, 내가 가진 문제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들을 내가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워할 수가 없고, 원망할 수가 없다. 어떻게 나를 피고석에 세운 사람을,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거나 루머를 퍼뜨린 사람들을, 내 도움을 실컷 받아놓고 뒤에 가서 욕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밉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때로 울부짖기도 했지만, 늘 결국엔 내 잘못을 찾고 자기 성찰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조금 원망하다가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애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라거나 그 애가 그렇게 된 데는 내 잘못도 있지...라고 결론을 내리는 식이었다. 그게 내 마음이 편했으니까.


상대가 다혈질이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나의 이런 회피는 더 심각해졌다. 나에게 부당하게 구는 상대와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하지 않는 것"으로 상황을 피하려고 했고, 그게 문제를 키울 때도 있었다.


내 환상 속에서 어떤 싸움이 일어나도,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피고석에 열 번 서는 일이 있어도 나는 끄떡하지 않을 내면의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내가 부끄럽지 않다면, 나는 이겨낼 것이니까. 맞서 싸운다면 나는 이길 것이고, 세상은 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환상을 믿고 무리하게 버티고 이겨내고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다. 억울함과 분노를 쌓으면 결국에 터지게 되어 있는 연약한 보통 사람이었다.


상대가 죽을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안 죽어요. 저렇게까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이 왜 죽어요? 저 사람도 자기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건데. 나쁜 놈은 절대 죽지 않는 법이니까 맞서 싸워요.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미워하고 원망하고 싫어한 상대가 갑자기 죽어, 내 삶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정신 상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단지 내 성격이 좋고 이해심이 넓어서라고 생각했지, 타인에 대한 내 한량없는 이해에는 공포심이 숨어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괴로움에 발버둥 치던 때 누군가가 나에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냐고 물었고, 그 말에 억압되어 있던 기억이 하나 불쑥 떠올랐고, 그래서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다혈질인 엄마와 동생 사이에서 착한 역할을 하려 애썼던 내가 거기에 있었다. 어린 시절 딱 한 번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림으로써 받은 충격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내가 미워한 것과 친구의 죽음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고, 그건 단지 사고였을 뿐인데도 어린 시절부터 착해야 한다는 강박과 자책하는 습관 때문에 이상한 사고방식이 자리 잡아버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 한량없는 이해심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엄마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던 나, 국민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 결핍되었던 나, 고등학교 때 사건 이후 스스로를 벌하던 나를 하나하나 만나고 안아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너 때문에 죽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잠시동안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싫어했던 대가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치렀으니 이제 그만 해방되어도 좋다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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