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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Apr 12. 2024

그만하자 할 수 없다

일상의 단상

그만하자 할 수 없다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라는 말이 있다.

'애'는 우리 뱃속의 '창자'를 뜻하고 '간장'은 '간'을 뜻하는 말이란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언제 이런 말을 쓸까!


사전에서는 '몹시 초조하거나 안타깝고 걱정될 때 쓰는 말'이며 비슷한 말로는 '애간장이 마른다' '애간장이 녹는다'도 있다. '애간장이 타다' 보다 앞서 단장지애(斷腸之哀)라는 말도 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환온(桓溫)이라는 사람이 촉나라로 가는 길 양자강 줄기에서 새끼 원숭이를 잡아 배에 싣고 가자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찾으려 울부짖으며 백리 남짓 쫓아오며 배에 오르려다 그만 죽고 말았다.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니 애간장이 타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은 곧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뜻하는 말이 된다.



이런 고통을 십 년째 겪는 부모와 가족들이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 떠났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그 배를 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가족과 부모들이다.


그날, "세상(世)을 초월(越)한"이라는 뜻을 가진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친구들과 추억 쌓을 생각에 들떠 있었을 아이들이 있다. "기다리라"는 말에 물이 차오르도록 그 안에 있다가 선실벽을 긁으며 공포 속에서 죽어갔을 아이들이 있다.

탑승자 476명 가운데 172명만 구조되고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생존율 36.1% 밖에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 앞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로 유학온 미얀마 네팔 베트남 학생들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날 대참사를 겪은 사람들 모두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참에 공식 기록을 대충이라도 훑어보자.


그날, 오전 8시 52분 32초 전남소방본부 119 상황실로 최초 신고 전화가 걸려왔고, 최초 신고자인 학생이 던진 첫마디는 "살려주세요"였다고 한다.

9시 25분 서해해경청 소속 헬기 511호와 해경 123정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세월호와 교신을 물론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도 하지 않고 10시 13분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을 태운 채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사고 원인을 찾다 보니, 2009년 대한민국 해운법 시행규칙이 개정된 사실과 더불어 여객선 운용 시한이 진수일로부터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고, 세월호가 있는 청해진해운은 일본에서 1994년 건조해서 운용시한 18년 정도 된 배를 사들여왔다.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세월호를 담보로 산업은행에서 개보수 자금으로 100억 원 정도를 빌려 세월호를 고치느라 톤수가 239톤 늘었다. 탑승 정원도 116명 늘렸다. 세월호의 증축에 대하여 선박 설비 안전 검사 기관인 한국선급은 2차례나 문제가 없다고 평가했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구명정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기울어지며 침몰한 원인 가운데는 무리한 개조·증축도 있다는 견해다.


그날, 세월호는 운항관리자에게 차량 150대, 화물 675톤을 실었다고 보고했으나, 사고 뒤에 밝혀진 건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이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검찰은 2014년 10월 6일 사고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었다.

첫째, 12년 일본에서 수입된 후 수리 증축에 따라 총톤수가 증가(239톤) 하고 좌우가 불균형하게 되었으며,

둘째, 사고 당일 최대 화물 적재량(1,077톤)의 2배에 달하는 과적(2,142톤)이 있었고,

셋째, 선체 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등을 1,375.8톤 감축 적재하였으며,

넷째, 관계 법규에 의하지 않는 방법으로 차량 컨테이너를 부실 고박(선실에 고정하는 일)하는 가운데,

다섯째, 사고 해역 통과 시 조타할 의무가 있는 선장이 선실을 이탈하고 근무 항해사와 조타수가 과도하게 변침(항로 변경)하는 등 운항상 과실이 더하여 침몰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던 검찰 발표는 다음과 같이 기각되었다.

첫째, 세월호의 증개축은 한국선급에 의해 허가를 받고 진행된 사항이며, 이로 인해 증개축의 위법성은 재판을 통해 인정되지 않았다.

둘째, 과적은 만재흘수선(적재한계선)이 기준이므로 법적으로 과적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검경 합수부 자문단 보고서에도 운항상 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셋째, 평형수는 원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운항 상황에 따라 조절 가능한 것이며,

넷째, 선원 재판 1심에서는 이준석 선장이 조타실에 재선 하여 직접 지휘할 의무가 없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범죄사실에서 제외되었다.




그날, 국가는 아이들 곁에 없었다. 곁에 있던 사람은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탈출을 도우며 배에 끝까지 남아 있던 세월호 승무원이었다.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 통장에 돈이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라는 말을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호 사무장이었다.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조끼를 나누어주며 대피를 돕던 단원고 2학년 6반 담임 선생님과 난간에 매달린 아이들을 탈출시키다 실종된 2학년 5반 담임 선생님이었고, 제자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탈출을 돕던 체육선생님이었고,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구출했던 선생님들이었고, "너희 거기 있으면 다 죽는다. 힘이 들더라도 여기로 올라와야 한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학생들의 탈출을 도왔고, 먼저 구조될 수 있었음에도 "빨리 나와라. 이쪽으로 와라."라고 외치며 끝까지 학생들을 구하다 나중에야 배에서 빠져나왔던 교감 선생님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물이 찬 선실에 갇힌 친구들을 구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단원고 학생들이었고,

여학생들 방을 찾아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대피하라 알리고 스무 명 남짓을 구한 학생이었고 (이들 모두는 그날 목숨을 잃었다.) 그날의 생존자들이었다.


생존, 공포 속에서 아이들을 구하느라 애를 썼던 이들은 살아왔으나  살았어도 산 목숨이 아니다. 애를 태우던, 애를 태우며 공포에 떨던 아이들의 눈빛을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로 몸도 망가지고 지금 삶도 망가진 채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한다.


국가 대신 아이들 시신을 찾으러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던 스물다섯 명의 민간 잠수부들 가운데 골괴사 판정을 받은 잠수사는 8명, 디스크와 트라우마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잠수사는 무려 18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가 대신 나서서 영웅이라고 불렸던 민간 잠수사들, 뼈가 괴사를 하는 최악의 벼에 걸렸어도 치료비는커녕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스스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다. 잠수업으로 생계를 잇던 잠수사는 생계마저 막혔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은 '기본을 지키지 않아 일어난 대참사'임에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 기소가 되었어도 솜방망이 처벌이거나 무죄 선고를 받았다.

진실을 밝혀 더 이상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관계자들은 기본을 어긴 잘못을 숨기고 덮느라 바빴고 꽁무니 빼느라 바빴다.


배가 가라앉는 101분 동안, 목숨을 잃어가는 동안 발만 동동 구르며 애간장 태우며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날은 낙인처럼 새겨져 진실을 파헤쳐 달라 외치던 가족들은, 원숭이 만도 못한 공감 능력을 가진 이들로부터 무관심을 넘어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희롱과 조롱에 거친 막말을 들어야 했다.

"시체 팔이 하냐"는 "그만해라"로 바뀌어 외면해 오는 동안, 그날은 또 오고 말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여전히 나 몰라라, 아니 한 술 더 떠 책임져야 할 관계자들을 두둔하고 있었다. 공감력 없는 이들은 또다시 "누가 그곳으로 놀러 가라더냐" "놀러 간 것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며 타들어가는 애간장에 난도질을 해댔다.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가 마음 놓고 놀러 가서는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는 건 말도 안 되게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제2 제3의 사일육 십이구가 일어나면 안 된다.

더 이상 유족들과 생존자가 제2 제3의 트라우마를 겪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면 맺힌 마음 맺힌 아픔들을 알아주어야 한다.

유족들과 생존자들 마음은 곧 죽은 이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니 "얼마나 힘드냐, 얼마나 무서웠냐"라고 물어봐 주고 손 잡아 주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기본을 지키지 않고 소중한 가족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아픔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맺힌 마음이 풀어진다. 국가가 먼저 나서서 치유를 해줘야 한다.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만이 맺힌 것으로 부터 서로가 해방되는 길이다.


십 년 전 나는, '나이 먹은 게 미안해서' '앞으로 기본을 지키며 살자'는 마음에서 기억 팔찌를 했다. 어느새 십 년이 되었고 팔찌는 얇아지고 새겨진 글자도 많이 닳았다.

그러나 그날의 아픔과 슬픔에 아랑곳 않고, 막말하는 자들은 그대로인 듯하고 시퍼렇게 멍울진 가슴으로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가족들과 부모들의 아픔과 슬픔도 그대로인 듯하다.


살다 보면 잊는 일들이 많고 잊고 싶은 일들도 많다. 기억에서 멀어지는 일도 많고 기억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일도 많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도 있다. 복수나 응징이나 대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끔찍한 악몽의 대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거울 삼고 본보기 삶기 위해서다.


십 년, 잊지 말자는 마음에 기억 팔찌를 하나 더 늘렸다. 대로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기억이 엷어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그날'이 또 와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그만하자'는 말 그만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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