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P 동생 이야기 #3
여러 가지 계획들이 있었는데,
내 인생은 2023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
아빠가 갑자기 내 곁을 떠나신 지 19일째,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고 괜찮지 않다.
그래도 조금의 용기가 생겨 정리를 해본다.
12월 딱 한 달, 내 마음이 참 편안했다.
오랜만에 다시 학술지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게재 확정이 되어서 기뻤고
논문 심사 100점을 받았다고 100만 원을 논문 축하금이라며 입금해 주신 아빠의 통 큰 유머에 감사했고
비자 해결, 계획했던 개인 연구 시작, 남편의 승진, 아이들도 적응 잘해서 즐겁게 학교 다니니
그 어떤 것도 마음에 걸릴 일이 하나 없이
매일매일이 평온하다고 느낀 12월이었다.
2023년 12월 30일 밤,
내일 아침에는 연말 맞이 대청소를 해야지,
그리고 좋아하는 지인과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카운트 다운을 하며 만두를 빚어야지.
2024년 1월 1일에는 떡국과 만두를 먹으면 되겠다.
그런 소소한 계획을 갖고
누워서 핸드폰이나 보다가
잠이 들었다.
밤 12시쯤 언니가 나를 깨워 언니 방으로 조용히 데려갔다.
아빠가…
아빠가 건강검진 결과가 안 좋대
아빠가 엄마가 아프다고 하시네
아빠가 한국으로 당장 들어오래
아빠가 무언가에 엄청 화가 나셨대
뭐 그런 말을 상상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셨대, 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지금 돌아가실 수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을 듣는 순간 당장에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고 언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당장 달려갈 수 없는 거리에서 가족의 부고를 듣는 것처럼 애타는 일이 또 있을까.
그다음은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소식 듣고 비행기 뜨기까지 15시간, 비행기 안에서 11시간을 눈물로 보내고
공항에서 빈소로 달려가고.
아빠와 함께 찾곤 했던 우리 가족 묘.
들어가는 입구 쪽이 가파르고 아이가 혼자 가기엔 길이 어려워서,
아빠는 늘 내 딸을 번쩍 들어 올려서 가족 묘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아빠의 장지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더 이상 손 잡아주고 안아줄 할아버지가 없어
위태위태하게 혼자 발을 디디고 가는 딸을 보니,
그게 그렇게 슬퍼서 또 많이 울었다.
낯선 절차를 마치고
아빠가 계시던 친정집에 1년 만에 들어왔다.
아빠가 없는 집에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러닝셔츠를 입고 티브이를 보고 계시던 아빠가
“아빠가 애기 안고 올라오게 아래층에서 전화를 하지. 힘들게 왜 그냥 올라왔어~” 라며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다)
다정하게 내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고 반겨주셔야 하는데...
이게 뭐예요 아빠.
집을 둘러보니 아빠의 정갈한 흔적이 가득하다.
내 책상 의자에 아빠의 머플러가 반듯하게 접어 걸쳐져 있고
늘 입으셨던 청바지와 티셔츠도 항상 걸쳐두시던 옷걸이에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에는 싱싱한 재료들이 가득.
아빠는 운동삼아 다니신다며 늘 직접 장을 보셨고,
밤잠을 주무시다 세상을 떠나신 그날에도 오후에
매일의 루틴으로 이마트에 다녀오셨었다.
잘 개어져 있던 아빠의 장바구니 안에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장을 본 영수증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너네 할아버지가 그 옛날에 장바구니 딱 들고 골목을 나서던 분이야”라고 아빠는 웃으며 말하셨었다.
그리고 아빠 본인도 세상을 떠나시기 전 날까지 그런 삶을 사셨다.
은퇴 후에는 매일의 루틴으로 신선하고 믿을만한 먹거리를 직접 골라 냉장고를 채워두시던 아빠.
절대 중요한 식재료를 떨어트리는 법도 없었고
그렇다고 절대 넘치게 사서 버리는 법도 없었다.
아빠의 삶은 참 한결같이 단정하고 반듯하고 정갈했다.
아빠의 삶으로 나한테 어떤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을까.
생각날 때마다 글로 정리해 두면 나와 내 아이들에게 뭔가 좀 남게 될까.
모르겠다.
글을 쓰느라 아빠 사진들을 찾아보고 기록에 남겨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