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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감 Aug 14. 2023

첫인상

수능 만점자의 학교 3편

자습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앗싸아아아'


속으로 환호하며, 불을 켜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현재 시각은 6시 30분. 이 시간에 오면 대부분 비어있었지만 며칠 뒤면 3월 모의고사라서 열정 넘치는 옆 자리 아이가 미리 와서 공부하고 있을까 살짝 불안했다.


고3 전용 자습실은 건물의 두 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는 지정석, 백퍼센트 랜덤. 원래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층씩 나누어서 썼지만, 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남학생들만 있으면 자습시간이 동물의 왕국이 된다고 반반 나누어 섞었다. 약 2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자습실은 잠이 올 때 쓰는 공유석을 중심으로 남학생 자리와 여학생 자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 자리는 공유석과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창가였다. 심지어 옆자리는 공석. 남중을 나온 터라 또래 여학생들에 대해 약간의 미지의 공포가 있었던 나는 내심 자리에 안도하고, 빈 자리에 책을 쌓아둘 생각에 기뻐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여학생들의 자습 신청률이 남학생들보다 높아서 여학생 쪽의 자리가 부족했고, 결국 몇몇 여학생이 남학생 쪽 자리를 쓰게 되었다. 두발 규정 귀밑 5cm는 작년에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혼자만 그 사실을 모르는 건지 귀밑으로 똑 떨어지는 칼단발을 한 조그만 여자애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토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이 마주친 것은 순간이었지만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에 다갈색으로 빛나는 흑색의 머리가 신기했다. 동그란 눈은 쌍꺼풀 없이 컸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단정했다. 그래도 일단은 중간고사 전까지 함께 쓸 예정이니까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여자애는 쌩하니 지나쳐서 제자리에 짐을 놓았다.


-퍽


가방이 부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음. 정정하겠다. 첫 인상은 나빴던 것 같다.


옆자리 애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항상 자습실에 저보다 먼저 와 있었으니까. 등교 시간인 8시 30분보다 1시간 일찍와서 꺼져 있는 자습실 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조례 시간에 맞춰서 반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는데, 그 애는 항상 먼저 와서 모의고사를 풀고 있었다. 사각사각 종이를 긁는 연필 소리와 촤악 하고 넘어가는 문제집 소리.


소리에 민감한 편이 아닌데도, 그 소리만 듣고 있으면 왜인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아마도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닐까. 부모님이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모르는 것이 아니니까. 고3쯤 되었으면 이제 슬슬 그들의 말처럼 쓸데없는 짓은 관두고 수능을 위해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 애 옆에 있으면 들고는 했다.


그래서 한 3일 정도 가다가 자습실에 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사서 쌤과의 친분을 이용해 아침에 도서관 책 정리를 돕고, 대신 책을 읽었다. 정리를 끝내야 책을 읽을 시간이 나서 등교 시간이 한 시간 더 빨라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어두껌껌한 공간에 가장 먼저 불을 키는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도서관 석면 공사가 시작되었다. 야속하게도 익숙해진 몸은 6시에 눈이 떠졌고, 집에 있기는 싫어서 대충 책상에 있던 것들을 쓸어담아 가방에 넣고 자습실로 향했다. 과목별로 분류된 문제집과 깔끔하게 반으로 접혀 정리된 모의고사 종이들로 가득 찬 옆자리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책상 위에 가로로 탑 세개를 이루고 있고, 정작 책장은 텅 비어있는 내 자리와 비교되어서 나는 작게 웃고 익숙하게 가방에서 어제 읽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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