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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감 Aug 17. 2023

엇갈림

수능 만점자의 학교 4편

자습실은 너무 높았다. 17살 때까지만 해도 꽤 쓸만했던 체력은 18살을 거쳐 19살이 되면서 끝없는 하향 곡선을 그렸다. 일주일에 유일한 땀 흘리는 시간이었던 체육 시간까지 고3이 되면서 이름만 체육이지 자습 시간으로 바뀌었다. 입시 실적 아래서 예체능 과목들의 필요성은 사라졌고, 적은 시간을 들여도 남들의 배가 되는 결과를 내는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과목들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수영사탐외 각 과목별로 하루에 최소 3시간은 투자해야 했다. 꽉꽉 채워진 플래너의 타임 테이블에 운동 시간을 넣는 것은 사치다. 담임 선생님의 말처럼 원래 고3은 지금까지 쌓아온 기본 체력을 야금야금 파먹으면서 버티는 것이다.


왜 고3한테

제일 높은 자습실을

주는 거야


헉헉거리면서 계단을 오르다보면 1, 2학년의 자습실은 내리막길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주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라도 고삼을 움직이게 만드려는 학교의 계략인 걸까. 가방도 무거운데. 정말 너무하다.


도착한 자습실은 쾌적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환기를 하고 에어컨을 틀었는지 어제의 쿰쿰한 먼지 냄새는 사라지고 환하고 시원한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작은 감동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내 자리로 갔더니, 옆자리에 사람이 있었다.


그 애였다.

서유안.



***


평소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데, 그 애의 이름은 선택 수업에서 듣자마자 뇌리에 퍽 하고 박혔다. 살면서 그렇게나 이름과 얼굴에서 느껴지는 인상이 비슷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서유안은 전교에서 유명했다. 한음고와 같은 재단의 중학교인 한음중에서 전교 일등으로 졸업해서 학교에서 가장 파워가 강한 전교권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딱 붙게 수선해서 입는 유행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헐렁하게 각 잡힌 교복 바지와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와이셔츠. 그리고 그 위의 오버핏 카디건. 어떤 계절이든 그 애는 항상 카디건을 입고 다녔다.


한 번도 말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여자 아이들이 그 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자주 전해들었기 때문에 약간의 호기심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습실에서 같이 앉게 되고 그 애가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들어올린 것을 보았을 때, 도저히 마주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저 애는 지금 자기가 주변의 모든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까?


그렇게 첫 만남을 대차게 말아 먹었다. 중간고사 전까지 어색하게 자리를 공유할 생각을 하니 절망적이라서 기숙사로 돌아와 이불을 엄청나게 찼다.


놀랍게도 서유안과 나는 생활 반경이 비슷했다. 아침에 등교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학교에 와서 모의고사를 풀 때도, 점심시간에 30분 동안 밥을 먹고 남는 시간 동안 자습실에 와서 단어를 외울 때도, 저녁을 대충 샐러드로 때우고 와서 남는 시간 동안 2배속으로 인강 2개를 볼 때도 걔는 내 옆에 있었다.


월요일에 그 손을 무시하고 나서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거의 일주일의 일상을 의도치 않게 함께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서유안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 애가 내가 소문을 듣고 상상한 것과는 다른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와 공유하는 침묵은 안온하고 편안했다. 내일이면 금요일. 학교에 등교하는 일주일이 끝난다. 그 애가 주말 자습을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니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사과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금요일 아침에 책상은 비어 있었다.

또 늦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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