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만점자의 학교 1편
나는 겁이 많다.
그 사실을 태어난 다음 17년이 절반 정도 지나던 해에 깨달았다.
날 때부터 급이 정해져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시니컬하게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나는 느렸다. 웃으며 하는 말에도 힘이 담길 만큼 높은 자리에는 설 수 없었다. 그 뒤틀림을 깨닫고 난 뒤부터 자주 멍하니 앉아서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의 세계는 점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타인의 사정까지 고려하기 힘들 정도로 좁아졌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세상은 혼자 서서 살아가기에도 벅찬 곳이다. 나는 이제 따뜻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다가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삶을 원한다. 타인과 경쟁하거나 부딫히지 않고, 소음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고, 깊은 산 속 작은 샘물 위를 둥둥 떠가는 나뭇잎처럼 안온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이다.
영재들이 모이는 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중학교에서 나름 전교권에 들었다는 아이들이 모이는 도에서 손꼽히는 학교에 입학했던 것은 사실 특별한 의욕이나 동기가 있어서라기 보다 집이 가깝고 아버지 덕에 입학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한음고는 독특하게도 성적 중심인 고교 입시 사회에서 직원 우대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학생 중 약 50%는 B전형으로, 한음사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둔 학생이라면 생기부와 자소서, 면접을 기반으로 한 복잡한 입시 제도를 바로 통과할 수 있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특목고나 영재고를 노릴 만큼 월등히 우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입학이 보장된 한음고를 선택했다. 내 에너지를 굳이 고교 입시에 소모하면서 '한 학교에 몇 안되는' 기적적인 케이스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을, 책을 좋아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항상 나의 0순위였다. 순위 차트 안에 들어가지도 않는, 공기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익숙한 일. 나는 도서관의 옅게 떠다니는 먼지들을 들이마시며 익숙하게 800번대 서가로 향하고, 천천히 꼼꼼하게 책등을 살피다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반쯤 뽑아 뒷면의 설명을 읽어내리는 일이 즐겁다.
보통 한 서가를 지날 때마다 두어 권의 책이 손에 들린다. 만족스러운, 읽고 싶었던 종류의 책이 나오면 작은 탄성을 숨길 수 없을만큼 기쁘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나는 책에 한해서는 욕심이 많은 것 같다. 행여나 봐둔 책을 누가 가져갈까, 매번 빌리지 못한 책을 찍어두었더니 사진첩이 책 사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절대 분류는 하지 않는데다가 도서관에 들릴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서가를 살펴보기 때문에, 사실 그 사진들은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종류별로 분류해 차곡차곡 탑으로 만든 후, 한 권 씩 읽어나간다. 한음고는 대입을 중요시하는 학교이므로 확실히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주변의 학생들은 열심히 국영수 주요 과목을 붙들고 있다.
부모님 덕에 들어온 학교에서 나는 하루의 종일을 책을 읽으며 보낸다.
언제 종이 치고, 해가 지는지. 주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나 선생님의 출석 체크 따위는 어느 순간부터 전혀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저 눈 앞의 종이 뭉치만이 유일한 관심사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