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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니 Oct 08. 2024

철학적 사고가 부족한 한국인

독서를 통해 나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아와 세계관의 확장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꿈을 찾고, 주식 투자의 통찰을 얻으며, 달리기라는 평생의 취미와 건강 루틴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인 변화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과 사고가 성숙해졌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는 비교적 좁은 세계관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는 단일 민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관점과 문화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꿈이 없는 것도 세계관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좁은 세상 안에서 꿈을 찾으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세상을 좁게 바라볼수록 꿈의 크기와 발전 가능성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는 빨리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성급한 경향이 있으며, 사고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철학적 사고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철학적 사고가 부족하면, 우리는 삶의 복잡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세계관을 넓히고 사고의 깊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를 경험하거나, 인문학적 성찰과 철학적 탐구를 통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철학이란 학문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자, 세계관을 확립하고 넓혀가는 중요한 도구다. 철학은 우리의 사유의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단순한 이론이나 외워야 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철학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설정하며, 나아가 우리의 태도와 결정에 영향을 주는 필수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철학이 다소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학문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실은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다. 철학을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면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으며,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지혜란 다양한 관점과 사고방식을 종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특히, 철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포괄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그 너머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철학적 사고의 힘이다. 철학은 고정된 사고의 틀을 깨고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더 넓고 깊은 시야를 제공한다.

철학적 사고는 관념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미처 보지 못했던 해결책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철학적 사고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큰 그림을 보고 삶의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는 통찰력을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이 대중적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 서양 철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기와 맞물려 있었다. 서양 철학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그 영향력은 미비했으며, 철학은 주로 정치적, 종교적 담론 속에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철학이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대중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철학적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6세기부터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유교, 도교 같은 철학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단순히 학문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정치, 교육, 가족 구조 등 전반에 걸쳐 실천적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도 그 영향이 깊게 뿌리내렸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년)을 기점으로 서양 철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불교, 유교, 신토와 같은 전통적인 사상 체계를 통해 이미 깊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의 사상과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사상들과의 융합을 시도하여 독특한 철학적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빠르게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이와 비교해보면, 한국은 철학적 사상이 늦게 도입되었을 뿐 아니라, 서양 철학이 사회에 뿌리내릴 시기마저 정치적 혼란기와 겹쳐 철학의 확산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인 유교 또한 정치적, 윤리적 틀로만 받아들여졌지, 철학적 사고로 발전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한국이 철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한국인과 철학적 주제를 다룰 때, 어색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철학이 깊이 있는 논의로 자리 잡기보다는 실용적이고 표면적인 주제가 더 자주 다뤄지기 때문이다. 철학적 질문이 던져질 때 본질적인 탐구보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가는 경향이 있고, 이는 대화가 충분히 심화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대화 스타일은 실용적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과도 연관이 깊다.

한국인은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주로 지식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철학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암기하고 이해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철학의 본질적인 가치와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거나 철학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레고의 사례는 철학적 사고의 실질적인 가치를 잘 보여준다. 레고는 한때 위기를 맞았을 때 단순히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표면적인 질문 대신 "아이들은 왜 놀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문제를 해결했다. 이 철학적인 질문을 통해 레고는 놀이가 단순한 즐거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통해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창의성, 상상력, 그리고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운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레고는 철학적 사고를 통해 제품과 마케팅 전략을 재정비했고, 장난감의 물리적인 형태나 기능을 넘어서 놀이가 아이들에게 주는 경험과 배움에 더 집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레고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도구로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철학적 사고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철학은 본질과 변화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어떤 것이 단순히 변한 것과 변질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변질이란 본질이 훼손된 상태로, 이는 그 대상이 원래 지녔던 핵심적인 성격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변화는 본질을 유지한 채로 새로운 모습이나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고가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놓치고, 변화 자체를 변질로 오인하게 될 수 있다.

철학적 사고는 주체성을 강화해주며,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때 쉽게 조작되거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입하여 우리의 현실 감각을 흐리게 만들고, 자아를 흔드는 심리적 조작 수법이다. 철학을 통해 우리는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변화와 변질을 구분하고, 외부로부터의 왜곡된 영향력에 흔들리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철학의 중요성은 아스펜 연구에서도 강조된다. 단순히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만으로는 문명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철학적 사고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준다. 철학적 교양이 없다면 선한 영향력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철학은 개인이 상황을 깊이 통찰하고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그 가치를 발휘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철학적 사고가 왜 중요한지를 잘 설명하는 사례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재판을 보며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사회적 시스템을 따를 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악행에 가담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녀는 이러한 행동이 특별히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시스템에 휩쓸려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철학적 사고는 우리가 시스템이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다. 철학은 단순히 변화에 반응하기보다는 그 변화가 어떤 본질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면밀히 분석하고,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비판적으로 사고하도록 돕는다.

철학은 한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통찰력과 해결책의 집합체로, 시대에 맞는 철학적 사고가 꾸준히 발전해왔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의 비즈니스맨에게도 매우 중요한데, 철학적 사고는 그들에게 깊이 있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길러주고, 더 나아가 새로운 과제를 설정하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기업의 의사결정 시스템은 그 기업의 성장과 방향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경영진이 단순히 규칙을 만들고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체계와 목적이 변질되면 기업은 본래의 방향성을 잃고, 시스템 자체에 종속될 수 있다. 철학적 사고는 이러한 변질을 방지하는 중요한 도구로, 기업인에게 윤리적 판단을 심화시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특히 기업의 인사 평가 제도나 경영 활동에서 철학적 사고는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라 직원과 조직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윤리적 경영은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철학은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강력한 도구로,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철학적 사고는 기존의 틀이나 고정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게 하고, 이를 통해 산업 간 경계를 넘나드는 혁신적인 생태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에서 벗어나 공유경제 모델을 창출한 에어비앤비(Airbnb)나 우버(Uber)와 같은 기업들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기존의 주거 및 교통 시스템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했다. 이들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자원 공유와 연결을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접근은 철학에서 말하는 사고의 확장, 즉 고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사고는 또한 산업과 산업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술과 예술, 교육과 게임, 의료와 빅데이터 등 전혀 다른 분야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철학이 본질적으로 다양한 개념과 시스템을 연결하고, 더 큰 세계관을 창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자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때로는 여러 자아를 연결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다양한 세계관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하나의 고정된 자아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수용하면서 성장한다. 또한,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내면 세계를 창조하거나 수많은 세계를 연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철학적 사고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창조하고, 우리의 인식과 경험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준다.

따라서 철학은 기업, 사회,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적 사고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와 깊은 통찰력을 제공하여, 우리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통찰력은 단순한 이익이나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기준을 고려한 경영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철학을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배워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철학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질문을 던져 우리가 스스로 삶과 세계를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어떤 철학이 진리인가를 묻는 것은 곧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 진리와 존재를 탐구하며, 근대 철학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에 기반한 인식론을, 칸트는 관념론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반면 동양 철학은 노자와 공자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며 덕과 자연스러움을 중시했다. 서양은 논리와 이성을 통한 진리 탐구에 집중한 반면, 동양은 덕과 관계 속에서의 조화를 중요시했다.

철학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접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맞는 철학적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반면, 스토아 철학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중요한 것은 철학을 통해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를 뜻한다. 니체는 초인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한다고 보았다. 즉, 초인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내면의 힘과 자율성에 의해 탄생하는 존재다.

"내 안의 초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각자가 철학적 탐구를 통해 자신의 인생 철학을 완성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인생에서 ‘딱 맞는’ 순간, 즉 자신의 길을 정확히 찾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내면에 존재하는 초인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철학을 느린 사색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사유는 즉각적인 결과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을 두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며 서서히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는 문화가 강하지만, 철학은 그와는 반대로 서두르지 않고 호기심을 유지하며, 중요한 질문들을 곱씹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너무 빨리 의미를 추구하고 창출하려 한다.

철학은 도착지에 대한 관심도 분명 가지고 있지만, 그 도달 과정에서의 깊은 사유와 성찰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철학적 사고는 마치 섬과 바다에 비유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는 지식의 섬이 커질수록 그 섬이 마주하는 모르는 것들, 즉 바다도 더 넓어진다. 이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끝없이 모르는 것들이 존재함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깨달음이 인간을 끊임없이 성찰하도록 만든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철학적 경구는 바로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성찰은 우리의 한계를 자각하게 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 더 넓은 세계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철학은 동양과 서양으로 구분되지만, 두 철학 체계는 서로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서양 철학은 주로 이원론적 사고, 즉 절대적이고 분리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반면, 동양 철학은 일원론적이고 전체성을 강조하며 상대적인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 둘을 엄격히 나누기에는 많은 유사성과 교차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양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동양의 도교에서 추구하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 즉 무위(無爲)와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둘 다 인간이 외부의 규칙이나 제약을 넘어서 스스로의 선택과 자유를 찾는다는 점에서 연결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은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며, 언어의 한계가 곧 사고의 한계임을 주장한다. 이는 유교의 정명(正名) 사상과 닮아 있는데, 유교에서는 이름과 명칭이 올바르게 설정되어야만 사회가 질서 있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둘은 모두 언어와 명칭이 사람들의 사고와 사회적 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니체의 초인(Übermensch) 사상은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이는 선불교의 깨달음 과정과도 유사하다. 선불교에서는 고정된 관념이나 도덕을 뛰어넘어 인간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미시 물리학의 양자역학과 동양 철학이 전혀 다른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개념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무상(無常)이나 도교의 공(空) 사상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원자의 99% 이상이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입자가 관찰 방식에 따라 파동처럼 보이거나 입자처럼 보이는 특성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동양 철학의 관점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또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는 동양 철학의 사고방식은 양자역학의 세계관과도 깊이 연결된다.

결론적으로, 서양과 동양 철학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들여다보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때로는 비슷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교차점은 철학적 사고의 보편성과 그 가치의 확장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철학에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늘 따르지만, "어떤 철학이 진리인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이는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산물이며,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진리는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항상 미래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고 본다.

진리가 미래에 존재한다면, 진실은 현재에 있고, 사실은 과거에 속해 있다. 그래서 나는 사실보다는 진실을 보려 하고, 진실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태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한국인들은 대개 그 반대다. 진리에는 큰 관심이 없고, 진실을 보지 못하며, 사실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측면만 보고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는 경우가 많고, 그 이면에 있는 깊은 의미에 대해 무관심할 때가 많다.

행복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스스로 느끼는 개인적인 행복보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객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인다. 남들이 인정하는 행복을 쫓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긍정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은 "롤모델"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롤모델을 가지는 것은 물론 나쁘지 않다.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아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우리가 결코 롤모델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롤모델은 그저 가이드라인일 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가 아니다.

결국 롤모델이 되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모습은 누군가의 복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위대한 버전일 뿐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롤모델이 주는 교훈은, 나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 우리 삶의 주인공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는 것이다.

예전에는 유명한 부자들이 나의 롤모델이었다. 그들이 이룬 성공을 보며 나도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 이유는, 롤모델을 삼더라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없고, 설령 된다 해도 나만의 삶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돌아보니 내가 추구하는 삶을 완벽하게 대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존경하는 사람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자, 니체, 박진영, 그리고 이본 쉬나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나만의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들의 철학과 삶을 통해 나는 더욱더 나다운 길을 찾아가고 있다.

노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니체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었으며, 박진영을 통해 꿈을 발견하고, 이본 쉬나드를 통해 비전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네 사람의 철학은 나의 생각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함께 융합되었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은 나의 사고에서 마치 화학 반응처럼 상호작용해 새로운 통찰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박진영을 제외한 이 모든 깨달음의 경로는 책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더 의미 있고 깊이 있는 경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책을 통해 얻는 배움의 본질이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롤모델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롤모델이 될 필요 없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명철함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데서 나온다. 그렇게 할 때,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자기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 점에서 표트르 대제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제국을 정복했지만, 내 자신을 정복하지 못했다." 이 명언은 외적인 성공보다 내면의 통제가 더 어렵고 중요한 일임을 일깨워 준다.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궁극적인 성공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철학자가 모두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철학적 성찰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행복이 단순히 외부적인 성취나 일시적인 즐거움에서 오지 않고, 깊은 성찰과 통찰을 통해 삶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철학적 성찰은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방향성을 명확히 설정하게 도와주는 나침반과 같다. 물질적인 성취는 순간적인 만족만을 주고, 그로 인해 쉽게 방향을 잃기 쉬운 반면, 철학적 성찰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깨닫게 하며, 더 깊고 지속적인 행복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철학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결정을 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다. 선택은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한 후에 이루어지지만, 이 과정에서 깊이 고민하는 것은 종종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 결정은 이러한 검토 과정 없이 직감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순간의 판단에 기초해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선택을 계속해서 고민하면, 그 불확실성에서 오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선택은 분석과 계산을 바탕으로 하지만, 결정은 직감과 통찰에 기반한다. 더 나아가, 결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오히려 더 큰 성과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결정의 순간은 깊은 성찰과 내면의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며, 철학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노자의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처럼, 결정을 내리는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는다. 이러한 자연스러움 속에서 내린 결정은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흐름에 맞춰 진행되는 결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길을 더욱 확고히 걸어가게 만들며, 선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 준다. 또한, 이러한 자연스러운 결정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일치시켜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니 철학을 통해 사고력을 기르자. 그것은 인생의 복잡한 길을 명료하게 만들고, 우리를 더 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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