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만남(Unexpected Encounter)
류머티즘 관절염이 심해져서 진통제를 먹었다.
이약은 한국에서 류미티스전문의가 혹시 모르니까 비상용으로 가지고 가라고 20일 정도 주셨다. 아껴두었는데, 벌써 이틀 동안 너무 힘들어져서 어제 낮부터 먹기 시작했다.
약기운 때문인지 오늘 아침에는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날씨도 다행히 비가 오지 않고, 아침에 잠깐 해가 나와서 일부러 햇볕을 쬐기 위해 근처 슈퍼에 갔다. 가는 길에 다른 집 지붕 위에서 물받이 청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혹시 우리 집 지붕 누수가 물받이에 무엇인가 걸려서 그런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물받이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전화번호를 받았다.
우리 집의 지붕 누수를 수리하기 위하여 온라인으로 지붕 수리를 요청했더니 대부분의 수리 업체가 1년 전에 예약이 다 차서 새로운 작업은 받기 힘들다는 답변뿐이었다.
영국은 한국처럼 집수리하는 것이 100배는 힘들다.
산 넘어 산산 산이다.
그 길로 나는 우체국으로 갔다.
현금 20파운드를 출금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영국에서는 많은 은행 지점이 폐쇄되었으며, 은행의 업무를 우체국으로 이관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물론 우체국이라는 단독 건물로 이루어진 지점들도 다 없어졌고, 주로 중형급의 편의점의 쪽에서 우체국업무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유일하게 단독적인 건물을 가지고 있는 우체국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우체국이다. 이곳은 최소 40년 이상 운영되고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일하시는 직원 분들은 평생 이곳에서 일하셨다.
이 우체국은 노인들이나 치매에 걸린 릴리, 장애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살리기 위해 온라인 대신 직접 방문해서 현금을 출금하고 공과금을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도 이에 동참하고자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의 무료 출금 기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러 우체국을 찾았다.
우체국에는 세 분이 일을 하고 계셨다.
어라? 보통은 창구에 두 분만 계신데, 오늘은 세 분이 앉아계셨다.
아하! 오전이라서 그런가 보다.
바쁜 시간이라 창구가 하나 더 열렸구나.
평소처럼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사실 수요일 오전은 보통 지인들을 만나거나 다른 일정을 잡는 날이다.
그래서 수요일 오전에 우체국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창구로 가서 20파운드 출금을 요청했다.
그때, 오른쪽 창구에 있는 여성분이 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너를 아는 것 같은데, 혹시 나 기억해요?”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중년 여성.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억이 안 나요.”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살았어요?”
“음, 오래전에 이곳에 삶았었고, 한국에 갔다가 이번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 혹시 너의 딸이 피아노 치지 않니?” “아니요.”
이쯤 되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분이 나를 다른 사람과 헷갈리시는구나.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사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그녀는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물었다.
“혹시 아기 마사지받은 적 있어?”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너 혹시 yang 아니니?”
“아니요.”순간 기억이 스쳤다.
“yang이라고? 나는 yang은 아니에요. 그러나 yang은 알아요. yang은 중국계 말레이시인이고 나는 그녀의 친구였어요. 생각해 보니, 우리 딸이 아기였을 때, young과 나는 아기 마사지 프로그램에 참석했었죠. 그때 당신도 그곳에 있었나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 너와 yang랑 함께 나도 아기 마사지받으러 갔었잖아."
잠시 yang과 나를 헷갈렸다가, 이제는 정확하게 나를 기억해 내셨다.
원래, 한국사람들도 외국인들이 비슷해 보이듯, 나에게도 백인종들이 헷갈린다.
과정은 어찌 되었든 간에 마침내 그녀는 나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녀의 기억력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제야 17년 전의 기억이 자세히 떠올랐다.
딸이 겨우 6개월이었고, '영'과 함께 아기들을 위한 마사지 프로그램에 참석했었다. 그때 만난 영국 여성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당연히 얼굴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녀의 크고 맑고 순수했었던 그녀의 눈은 기억이 났다.
tmi: 나는 평소 사람을 만나면 눈을 쳐다보고 이야기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거주할 때는 눈을 너무 똑바로 쳐다본다며, 조금 부담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났었다. 원래 눈이 나쁘고 다른 이들을 관찰하지 않는 성격인 탓도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의 창이라는 눈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그녀의 눈은 기억해 냈다. 오히려 영국에서는 상대방의 눈을 안 보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창구 앞으로 자리를 옮겨 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물었다.
그녀는 딸이 벌써 18살(그녀의 딸은 나의 딸보다 9개월 정도 빠름)이 되었다고 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나의 딸은 대학입시반이고, 법학을 전공하겠다고 해서 못마땅하다고 말해주었다.
굳이 몇 역씩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요즘 같은 인공지능이 발달하는 시대에 쓸모가 없어질 것 같은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세월호 사건을 예로 들어주며, 그 사건 이후로 딸에게 욕심이 없어졌고, 단지 그저 건강하게 집을 나가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딸은 우리 딸과 거의 동갑인데, 하필이면 코로나가 터져서 학교도 못 가니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졌고 방황을 했고, 결국은 자퇴까지 하며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집안에만 처박혀 있다가 다시 힘을 얻어서 학교도 다니고, 이제는 운전을 배우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딸에게 바라는 것은 건강하기를 바라고, 또한 먹고살만한 기술을 배워서, 자신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다가,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코로나는 우리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어. 2021년에 큰딸이 28살에 코로나에 걸려서 일주일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어.”라며, 우체국벽에 붙어 있는 큰딸을 기리는 큰 포스터를 가리켰다.
사진 속 큰딸의 모습은 그녀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젊디 젊은 그녀의 큰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괜찮아?”
“이제는 조금 괜찮아.”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동료가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니야, 너는 아직도 괜찮지 않아.”
동료의 말에 그녀의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어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가 괜찮아질 수 있겠는가ㅠㅠ. 영원히 안 괜찮을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근무 중이었다.
이제 그만 그녀가 업무에 집중하도록 도와줘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체국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은 손님이 우체국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깨졌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에 또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나왔다.
여전히 우체국 밖은 조각만 한 파란 하늘이 남아 있었고, 햇살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