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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남 Aug 07. 2023

#014화 @폐급도 칭찬받을 수 있습니까

  폐급(廢級). 군대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고문관 또는 일상생활에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본 책에서는 ‘관심병사’ 또는 ‘군쪽이’ 정도로 순화시켜서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한때 ‘폐급’이라는 용어로 내 가치를 저평가받던 속상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늘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선임들에게 칭찬받고자 했던 몇 가지 일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냉동실 얼음물 채우기. 군대에서는 주로 일과시간에 다양한 작업에 참여한다. 간단하게는 부대 보수에서부터, 무거운 훈련 장비 옮기기, 윤형 철조망 옮기기, 제초 작업, 야산에 풀 베기, 나무 베기, 연병장 청소, 창고 정리, 탄약고 정리 등등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작업에 동원된다. 특히 날이 더워지면 땀이 비 오듯 흐르기 때문에 항상 탈수에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물’은 곧 작업의 생명이었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리쬐는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작업을 하다가 주어지던 휴식 시간, 군인이 가장 만나고 싶은 건 사랑하는 애인도 부모님도 아닌 ‘얼음물’이었다. 만약 후임이 얼음물을 챙겨오지 않았거나, 미리 냉동실에 물을 얼려두지 않았다면 상당한 갈굼이 시작된다. 따라서 후임으로서 냉동실에 물을 얼려두는 행위는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보통 물을 얼릴 수 있는 시간은 작업을 마친 후, 또는 일과가 끝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 이 시간에는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고, 부모님이나 애인에게 전화하고 싶고, 단 1분이라도 샤워를 먼저 하고 싶고, 싸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이나 코인노래방을 이용하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기 위해 틈만 나면 1.5L 페트병을 잔뜩 챙겨서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페트병이 많을 때는 내 후임들을 데리고 함께 가기도 했다. 우리는 정수기 하나 앞에 매달려서 페트병에 물을 채웠고, 채우는 족족 냉동실을 채웠다. 페트병 입구까지 물을 꽉 채우면 부피가 증가해서 페트병이 터지는 일도 생겼으므로, 항상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물을 채우는 게 포인트였다. 부대 내 후임이 점점 늘어갔지만, 틈만 나면 페트병을 채우러 가는 내 모습을 보며 선임들이 지나가면서 칭찬을 하곤 했다. “항상 고생이 많아.”, “야, 너 혼자 채우러 가지 말고 후임들 데리고 가.” 등등의 칭찬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방송 듣고 뛰어가기. 앞에서 군대는 ‘액션’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다른 말로는 ‘보여주기식’인데, 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액션을 중요하게 여겼다. “행정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소대 내 3명, 소대 내 3명씩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창고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오전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겨우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이런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방송을 들으면 나보다 군번이 낮은 후임이 누가 있을지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단’ 뛰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잠깐이라도 더 쉬고 있으면 누가 나를 대신해서 뛰어갔을지도 모르지만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나보다 더 낮은 후임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쉬든 말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일단 내가 움직이는 것이, 자대 배치 첫날 형광등을 깨어 먹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였다. 이미지 쇄신의 길이었다.


  내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는 모습을 보던 선임들이 가끔 나보다 후임들한테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야, 쟤 뛰어가는 거 안 보이냐? 선임이 뛰어가는데 후임 새*들은 뭐 하냐?! 너희들이 쟤만큼 열심히 하냐?!” 그 말을 들은 후임들이 그제야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한테 “문*우 일병님,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후임이 선임의 작업을 ‘빼앗는’ 일 역시 금기시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엔 나보다 먼저 뛰어와. 가서 쉬어.”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늘 눈썹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나의 모습 때문에, 여러 후임이 욕을 먹은 것 같다. 그래도 나를 미워하진 않아서 돌이켜보면 다행이란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 셋째, 휴식 시간 물 셔틀. 군대에서는 다양한 상황에서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작업을 하다가, 축구 또는 농구 같은 체육활동을 하다가. 휴식이 주어지면 후임들은 일단 얼음물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얼음물을 소대 내, 또는 분대 내 가장 높은 선임에게 가져가서 물어본다. “○○○ 병장님, 물 드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선임이 물을 마시면 그다음 선임, 또 그다음 선임에게로 가져가는 식이다. 이렇게 물 셔틀을 마치고 나면 가장 마지막에 내가 마시시게 된다. 내 밑에 후임이 있으면 후임의 순서는 내 다음이었다. 보통 내 순서까지 물이 돌고 나면 페트병 안에 얼음은 있는데, 물은 별로 남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경우 나 역시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내 후임이 먹을 만큼의 물을 남겨주곤 했다.


  휴식 시간에 물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닐 때 조금 서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학교에서 무조건 사라져야 할 나쁜 문화인 ‘셔틀’. 중고등학교 때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매점 빵을 사다 주는 굴욕적인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솔직히 그땐 그런 나쁜 행태를 보면서도, 일진의 빵을 사 오기 위해 쉬는 시간을 반납하는 동급생들을 보며 ‘불쌍하다’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그 순간 얼마나 굴욕적이었고, 얼마나 끔찍한 마음으로 매점을 향했는지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들의 모습을 묵인하고, ‘쟤는 왜 저렇게 살까?’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내 학창 시절이 떠올라서 부끄러웠다. 나는 그 시절 그들을 외면했던 벌을, 군대에서 받았다고 생각한다. 다 내 업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얼음물을 들고 뛰었던 시절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 당시 나는 탭댄스라도 추고 싶었다. 암울했던 군 생활, 선임들의 칭찬을 먹고 다시 밝아지고 싶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을 반납했고, 뛰어다녔다. 물론 나의 이런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서 점차 나의 ‘성실하고 한결같은’ 이미지 확립에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이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동시에 자신을 찌르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다. 칭찬을 위해 누군가에게 ‘액션’을 취하고, 아부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지치고 병들게 만든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인간은 고래가 아니다. 알량한 칭찬 한 번 듣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항상 지키기 어려운 과제지만, ‘적당히’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입대 전 나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야, 적당히 열심히 하자. 그리고, 적당히 칭찬받자. 마지막으로, 틈만 나면 너 자신을 칭찬해줬으면 좋겠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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