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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일 Jan 18. 2024

눈비 내리는 날

아침에 눈이 많이 내리더니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바닥에 쌓인 눈은 얼어붙는 대신에 비를 맞고서 간신히 형체만 유지했다.

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날이 추웠다. 도착할 때쯤 되니 책을 펴 들고 있던 손이 차갑게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온기를 받은 손가락 마디에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일을 시작하고서 일 년 가량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일하는 행복을 알았다. 천직을 찾은 셈이다. 내 일에서 나는 대체자를 상상할 수 없다. 일터에서는 소속감을 느낀다. 새해를 맞이해서 내가 작년에 발행했던 브런치 글들을 읽었다.

<소설 쓰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할까>에 등장하는 학원장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처음에 느꼈던 그의 인상은 지금도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처음부터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지금 그 마음은 더 커졌다. 구성원이 둘 뿐인 조직에서, 내가 존중하는 상사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얼마간 겸허해진다.

<대학 졸업식날 초등학생에게 가르친 시>에 등장하는 윤오는 지난 12월 학원을 그만두었다. 타지로 이사를 가게 된 탓이다. 윤오는 자기 엄마에게 이사를 가서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고, 윤오 엄마는 집에서 학원까지 오는 길이 너무 멀어서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윤오가 마지막 수업을 하고 떠나는 날에 윤오의 얼굴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하는 영상 속 윤오 모습을 나는 텅 빈 교실에 앉아 몇 번이고 돌려봤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로 돈을 번다는 만족감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가르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므로, 나는 아이들을 알아가면서 삶을 배우고 있다.

2024년이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해가 바뀌어 나는 서른 살이 됐다. 정처 없이 기웃거렸던 이십 대를 보상받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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