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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Mar 22. 2023

대학 졸업식날 초등학생에게 가르친 시

지난 2월 졸업식을 치렀다. 오전 열 시쯤 학교에 도착해 구둣발로 교정을 밟았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2015년 입학 이래 2023년까지 적을 둔 학교였다. 나는 학사복을 대여한 뒤 식장 뒤쪽 자리에 일 분 정도 앉아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여몄다. 더러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학사모를 움켜쥐고 사진을 찍었다.

전날 밤 나는 머릿속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장소를 떠올렸다. 캠퍼스 내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 외벽 앞이었다. 특별한 추억이 깃들거나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서서 건물 외관을 살피려면 고개를 위로 올려야 한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나는 대학 건물을 인류가 쌓아 온 정신적 자산의 현현이라 여겼다.

건물 안쪽의 경우 눈길 닿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졸업생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택한 곳은 통로로 이용될 뿐 아무도 사진을 찍으려 들지 않았다.

두어 군데에서 사진을 더 남기고 예복을 반납했다. 차를 타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진눈깨비가 그친 뒤였다.

점심시간에 사람이 몰릴 것을 우려해 학교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잠원 한강공원 부근의 양식집이었다.

식사 도중 식구들이 소회를 물었다. 졸업하기까지 오롯이 내 뜻대로 내렸던 선택을 지지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나는 이날 졸업식을 마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식당 내 화장실에서 정장을 벗고 미리 준비한 편한 옷을 입었다.

식당을 나와 학원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헤르만 헤세가 쓴 소설 『유리알 유희』 속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이야기 말미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와 함께 수영하기 위해 노쇠한 몸을 끌고 강물에 뛰어든다.

나는 내게 예정된 하루와 소설 내용을 엮어서 생각함으로 피로한 와중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힘이 났다고는 했지만 학원에 도착했을 때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내 컨디션이 지난번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그래서 더 힘을 냈다.

운이 좋게 나는 섬세하고 예민하며 우애를 아는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자기 앞에 있는 자가 자신과 맞닥뜨리는 시간을 값지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마음을 열었다.

이날 수업에서는 시 쓰기를 가르쳤다. 행과 연 개념을 알려준 뒤 문장 형식을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써보라고 말했다.

예상외로 아이들은 곧잘 썼다. 수업을 처음부터  따라오던 여자아이는 강아지를 소재로 하여 시를 썼다. 다른 아이들은 의자, 지우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을 소재로 시를 썼다.

  ,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연필을    글자도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강아지를 소재로 시를  아이가 마지막 연을 거의 완성할 무렵까지도.

나는 남자아이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윤오는 시를 어떻게 쓸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어렵죠?”

아이가 대답했다. “어떻게 쓰는지는 알겠는데, 뭘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시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

나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바꾼 정의를 윤오의 프린트 공란에 적어주었다.

‘자연이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마음을 자유롭게 글로 쓴 것’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자연하고 인생, 무슨 말인지 알죠? 지금 창 밖을 보면 어느새 해가 졌잖아요. 아까 윤오가 학원 올 때는 어땠어요?” “밝았어요.” “맞아요. 해, 바람, 파도 같은 걸 보고 윤오가 느낀 걸 쓰면 돼요."

윤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교실을 한 바퀴 돌며 나머지 학생들이 완성한 시를 읽고 오탈자를 고쳐 주었다. 다시 윤오 차례가 됐을 때 써놓은 글을 살폈다.

윤오가 쓴 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밤은 어둡지만 그래도 별들이 반짝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내용의 시였다.

‘그래도 괜찮다’는 시구에서 드러난 윤오의 의지가 대견했다. 윤오는 일전에 진행한 동화책 수업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낸 인물을 닮고 싶다고 말한 내력이 있었다.

"잘했어요. 이게 시예요. 이렇게 쓰면 되는 거예요."

"선생님이 적어주신 것 덕분에 쓸 수 있었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말하자 윤오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윤오가 살면서 맞닥뜨릴 두려움들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편에서 임의의 두려움에 맞설 힘을 북돋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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