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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말 Mar 31. 2024

남의 먼지를 털어주고 싶을 때는

제 몸에 묻은 먼지부터 털어야

 3월의  주말 오전,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풍경은 어디나 비슷다. 만약 단지마다 1명씩 놀이터 그림을 그린 다음 그 그림들을 모아놓으면 같은 장소에서 그린 사생대회 그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실력은 제각각이겠지만. 허리춤까지 오는 미끄럼틀 계단을 오르려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린아이, 마치 아들을 하늘로 날려 보내려는 듯이 시소를 타는 아버지 자지러지게 웃는 아들, 앉고 선 아이 두 명을 태우고 끼익 끼익 비명을 지르는 그네. 발바닥을 미끄럼틀 바닥에 붙이고 딱 제 다리 길이만큼만 미끄러져 내려오는 여자 아이,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아이들을 울리는 공포의 뱅뱅이. 공터에서는 조금 큰 아이들 편을 나눠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다망구', '피구' 같은 놀이를 하고 있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골목이라는 공간, 주택가의 담벼락과 대문,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그 자체로 놀이터의 역할을 하던, 죽지 않을 만큼만 안전한, 콘크리트로 대충 만들어진 공간이 조금 더 안전하고 약간은 지루한 공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무튼, 3월 말의 토요일도 그런 날이었다. 베란다 샤시에 앉은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은은한 광택이 있는 싸구려 흰색 커튼은 쏟아지는 햇빛을 전부 차단하지 못하고 조명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무심코 바깥 날씨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겨울이 지나간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그런 빛이었다. 커튼을 걷으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은 잿빛이 무성한 산의 모습과 하늘색, 흰색을 대충 섞어놓은 듯한 하늘의 모습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길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에서는 꽃망울이 하나 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는 지각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하다.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비를 내린다. 꽃이 진 자리에는 초록색 잎이 자라나고 어느새 봄은 여름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다.


 거실 창문 손잡이에는 겨울 동안 쌓인 먼지가 소복하게 앉아 있다. 후 하고 먼지를 불어 보지만 먼지는 뿌리를 내린 잡초처럼 손잡이에 단단히 버티고 있다. 손잡이 잡아당겨 창문을 끝까지 연다. 상쾌한 바람은 한마디 인사도 없이 머리카락과 커튼을 밀어젖히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타지에 사는 아들 집을 찾아온 엄마의 시선처럼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다만 3월의 바람이 반가운 이유는 잔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 겨울바람은 우리의 생체리듬을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가을보다는 게을러지지만 그 덕분에 부지런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나도 일반적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겨울 동안은 계속 늦잠을 자고 할 일을 미루고 약속을 미뤄왔다.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니 긴장이 풀어지고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어깨 관절의 삐그덕거리는 느낌도 사라졌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 딱 좋은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적으로 이런 생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움직이는 편이 삶에 도움이 된다. 우선은 미뤄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 번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세워진 아파트의 외벽은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25층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소리는 듣는 사람의 신체리듬에 따라 활기를 띄기도 하고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환기(換氣)는 공기를 바꾼다는 의미의 한자이지만 주의나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의 환기(喚起)와 그 소리가 같다. 창문을 열었더니 청소가 하고 싶어진 것은 둘의 의미가 닮아있기 때문일까?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청소가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해치우는 편이 마음의 부담이 덜하다 점에서 보면, 하고 싶어 졌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환기의 핵심은 바람에게 입구와 출구를 만들어주는 것. 같은 방향에 있는 창문을 두 개 열어도 바람은 통하지 않는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어버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바람이 정말 잘 통하는 날에는 먼지떨이를 꺼내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는 편이다. 특히 벽면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먼지들이 아기 피부에 난 솜털처럼 붙어 있다. 때로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곳을 털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먼지떨이에 붙어 있는 먼지를 먼저 털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먼지가 가득한 먼지떨이로 무언가를 털어낼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서론이 길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청소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청소는 가장 효과적인 것부터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의 의미는 청소 전과 후의 차이가 가장 잘 보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아내가 모임이 있어 외출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모임이 일찍 끝나서 오후 이른 시간에 돌아왔다. 그때 아내의 입에서 '오늘... 뭐 했어?'라는 말이 튀어나오면 실패다. 그런 이유에서 나라는 사람은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서는 청소를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 물론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쉽게 일반화를 하는 것은 자칫 불합리한 편견을 후대에 물려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분리수거 쓰레기를 두 손에 들고 있는 중년 남성을 자주 마주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아이들에게 꼭 그것을 답습시킬 필요는 없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분리수거물을 보고 죄책감이 드는 것은 학습이 작용한 탓인지 아니면 책임감이 작용한 탓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것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일주일 넘게 쌓아 놓은 분리수거 쓰레기는 도저히 두 손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럴 때는 캠핑용 카트를 이용한다. 현관에 항상 캠핑용 카트가 나와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거나 딱히 놓아둘 공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카트는 본래의 용도로 5%를 사용하고 나머지 95%는 분리수거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캠핑용 카트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한쪽에서 많이 양보한다면 어쩌면 다목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카트에 분리수거물을 담기 시작했다. 마치 마트에서 적당한 박스에 식료품을 담을 때의 신중함으로 그리고 한방에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분리수거물을 쌓아 올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공동현관을 나가면 왼쪽에 U자로 꺾어지는 수레용 내리막이 있다. 바퀴가 현대 문명의 핵심 동력이라는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어쩌면 네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보다 적은 힘으로 분리수거 쓰레기를 가져가면서 새삼스럽게 인정했다.


 카트를 비우고 다시 U자형 오르막을 따라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저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됐기 때문인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계단 아래에는 10살 정도 됐을까? 그 정도 또래의 남자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잠깐만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고 말을 꺼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이들에게 동내 아저씨라는 이미지는 그렇게 썩 친절하거나 대하기 편한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도 아저씨를 찾는 이유는 대게 둘 중 하나다.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있거나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야 하는 일이 있을 경우다. 아이를 따라가니 분수대 옆에 있는 지붕이 딸린 쉼터를 둘러싸고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벤치 지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데려온 작은 아이는 "아저씨 저기 공 좀 꺼내주세요" 하고 말했다.


 아이들 중 그나마 키가 제일 커 보이는 남자아이가 초록색 대빗자루를 들고 공을 꺼내기 위해 점프를 하며 이리저리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빗자루를 든 아이에게 쏟아지던 응원의 눈빛들은 동내 아저씨의 등장을 시작으로 확신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표정 변화가 재밌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귀찮은 마음에 빨리 공을 꺼내주고 들어갈 생각으로 큰 아이에게 초록색 빗자루를 건네받았다. 빗자루의 길이가 충분히 길었고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기에 지붕 위의 공 위치를 대충 확인하고 가볍게 점프서 고무공을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주황색 고무공은 지붕을 데굴데굴 굴러 땅으로 떨어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를 데려온 작은 아이는 공을 잡아채고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이들도 덩달아 인사를 하는데 표정이 그렇게 해맑고 신나보일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이 정도의 감사를 받아도 되나 싶은 마음에 오히려 이쪽에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빗자루를 돌려주려고 고개를 돌리니 키가 큰 아이는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아까 그 무리에 좋아하는 여자 아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던 계획을 내가 망친 셈이다. 어쨌든 아이들은 나를 섭외(?) 해온 키 작은 아이를 따라서 놀이터로 달려갔다. 나를 원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세상이니까. 빨리 공을 꺼내서 다 같이 노는 것이 목적인 아이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목적인 아이는 문제의 접근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전자를 리더로 생각하고 따른다. 뭐 이런 경우야 단순히 내향적인 성격이라 혼자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고 내 성향만을 고집하다 보면, 기껏해야 청소하는 취향 따위나 설명할 줄 아는 정도의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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