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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수 Jul 22. 2024

봄 비는 가슴을 넘고

(1976년 3월 16일)

아래쪽에 있는 아이들의 방에 들렸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겠다는 생각을 하고  편안한 자세로 길게 눕게 됐다. 긴장이 풀렸는지 잠깐이 오전을 다 채우고 말았다. 지친 탓인가? 읽는 일도 명상하기도 싫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내 벙으로 돌아왔어도 무슨 까닭인지 앉았다 일어나기가 너무 힘이 든다. 지금까지 없던 일이다. 누웠다가 일어나려면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면서 쓰러질 것만 같으니 처음 겪는 경험이다. 하루 해가 길게만 느껴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그냥 방에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편이다. 조심조심 걸었다. 숲의 맑은 공가를 마시며 자연 속에 안기니 기분 전환이 된다. 할 수 있는 대로 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봄의 소리가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다. 오후 5시경 마침내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기를 시작한다.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제법 소리 내어 땅을 두드린다. 오랜만에 내리는 봄 비다. 농부들이 좋아할 기다리던 비가 아닌가? 당연히 내려야 할 비임에도 지금 나의 환경 여건에서는 극복하고 넘어야 할 장애물 경기와 같은 과정이다. 아직도 온돌과 맨땅 흙 방을 오가는 상태에서 불도 때지 않는 흙 방 위에 앉아있을 차례이니 그렇다. 외부에서 방문 객이 오는 날이면 온돌방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빗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3월 16일 금식을 마있는 하루가 되었으니 감사하다.



3월 17일

흐리고 바람이 약간 스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로 오늘이 시작된다. 밖으로 나갈 생각은 접었다. 방에서 이불을 등에 대고 앉아 바이블을 읽는다. 유리창 너머로 가리어진 구름 사이를 열고 산뜻한 빛을 비주는 태양이 얼굴을 내민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지난밤 촉촉이 내린 봄 비는 산천초목을 푸릇푸릇하고 싱싱하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자연과 달리 나의 몸과 맘은 약해지고 약해져 무너질 것만 같으니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 물만 마시며 17일을 보내는 중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정이다. 지금까지 잘 참으며 하루하루 힘을 기르고 있다. 


다시 태양은 숨바꼭질하듯 구름 속으로 머리를 감춘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업고 온 비를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조용히 내린다. 음악소리로 들으려고 마음을  비운다.



거꾸로 가도 봄은 온다.

3월 18일. 알가예보를 들으니 아침 온도가 영하의 날씨라는 기상 아나운서의 목소리다. 밤의 정적을 깨는 창문의 덜커덕 거림이 봄을 시샘하는 바람 탓이었나 보다. 막 피어나려던 꽃들이 잠시 주춤하는 아쉬움을 안고 움츠리는 모습이다. 방 안의 내 모습은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있어도 추위가 느껴진다. 이런 날은 가족이 있는 집아 그리워진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지면 결국 봄에게 떠밀려 쫓겨가게 되리라.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쉘리'(Percy Bysshe Shelley.1792-1822)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Ode to the west wind) 끝 부분에서           

         "예언의 나팔이 되어다오! 오 바람이여."( The trumpet of a prophecy O wind.)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behind.)     


30년의 짧은 삶의 자취를 남기고 떠나버린 시인의 한 줄 시를 음미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가슴 한쪽이 공허함을 맛본다. 비움의 공간에 또 다른 내일을 채우고 앞으로 나가자. 이제는 아무리 맛있는 먹거리가 있더라도 이미 포기했으니 어떤 유혹도 전혀 무관심의 영역에 있다. 오늘이 벌써 열여덟 번째의 금식일이 서서히 닫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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