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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수 Aug 05. 2024

아버지의 편지

(1976년 3월 20일)

계획한 일정의 절반이 되는 날이다. 마침내 반환접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매일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지치고 너무 힘이 드는 날도 있었다. 오늘이라도 산을 내려가면 그만이다. 누가 나무랄 이도 없다. 괜한 고집은 아닌가? 꼭 그렇지도 않은 점은 있다. 한 번 입술로 고백하고 다짐을 했다면 그 약속은 그대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평소에 영수증이 필요치 않다. 그냥 말로 주고받으면 그대로 영수증 이상의 효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다가 주위의 조언을 들었다.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를 위해 영수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록 그럴지라도 말의 신뢰성에 무게를 싣자는 의미로 정리를 했다. 


오늘은 머무는 여건이 냉방에서 온돌방으로 완전히 옮겼다. 긴장이 풀렸는지 며칠 전 겪은 무기력증에 헤매는 내 모습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 광대뼈의 윤곽이 두드러지게 선이 보인다. 작고 나약한 깡마른 어른 하나가 서 있다. 20일째  금식으로 이어지니 이해가 된다. 그러나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지방 중학교 주최 학교대항 연합육상대회가 열렸다. 오래 달리기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중학교 운동장을 벗어나나 왕복 6km를 갔다 오는 코스인데 반환점에 도착할 때쯤 너무 힘이 들어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완주했다. 이런 맘 갖고 처음 계획대로 실천하면 된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할 이유가 없다.


날이 저물어 어둠이 이미 산을 감싸고 있다, 저녁 7시가 지나고 늦게 올라온 학생이 내게 온 편지라고 하며 방문울 두드린 다. "수고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건네받았다.(이곳에 오는 편지는 산 입구에 만들어 놓은 우편함에서 가져온다). 보낸 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연필로 쓴 떨린 자국의 글씨는 가슴을 저리게 한다. 맞춤법도 맞춰가면서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평소에 듣지 못한 따뜻한 격려의 말씀에 눈물이 고인다. 나의 아버지는 흙과 더브러 살아온 순박한 농사꾼이다. 콩 하나를 심으면 반드시 한 개가 나와야 하는 원칙을 따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짓을 모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훈계하셨다. 아버지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초록의 5 월 초 부친인 나의 할아버지께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셨다. 서당 훈장이셨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한글을 깨치고 한문을 조금 익히다가 배움은 정지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소년가장이 됐다. 어린 두 어깨애 지게를 메고 산에 올라가 아궁이에 땔 나무를 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되었다. 가냘픈 손가락 마디마디는 거칠고 투박해져 글씨는 그림을 그리듯 쓰는 모습이다. 논과 밭 그리고 가정 이외의 활동은 거의 없었던 60여 년의 삶이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한 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는 결단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하여 교제의 폭을 넓게 했다. 지나고 보니 학교 등록금, 수학여행 경비, 신발 사는 일을 비롯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해결되는 통로였다. 아버지의 흘린 땀으로 인해 가족들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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