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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로 사라지는 나

1976년 3월 27일 - 31일

by 이상수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몸 처녀는 진달래로 붉게 산을 물들인다. 토요일은 내일을 위해 앉아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깊어지는 밤 시계는 어디에 멈추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작은 공간에 갇힌 작은 몸이 멀리 떨어진 섬에 던져진 느낌마저 든다. 풀벌레도 잠이 든 침묵의 시간이다.


장문을 통해 3톤쯤 되는 거대한 둥근 바위가 내 앞으로 글러와 멈춘다. 그 바위덩어리가 나라고 느꼈다. 하나 너무나 커서 나의 존재로 수용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큰 바위는 둘로 갈라진다. '내가 아니다'. 다시 갈라진다. 갈라지기를 계속하니 축구공만큼 되었다. 이제 됐겠지? 하는 질문이 내 속에서 나에게 던져진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너무 큽니다'였다. 다시 깨어지기를 반복하여 서릿대 콩에서 녹두 씨앗이 되었어도 크다는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들깨도 크게 느껴지다 바늘 끝에 묻은 "먼지 되어 바람에 사라지는"모습이 내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꿈도 아닌 무의식 상태에서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욕심을 버리자. 자아를 깨뜨려 과거는 철저하게 죽이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다짐한다.


일요일, 28알이다. 공동체 모암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와이셔츠를 입으니 조이던 목둘레가 헐렁해졌다. 앉았다 일어서면 어질어질하여 쓰러질 것 같아 벽을 기대고 의지한다. 오전 모임이 끝나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넥타이도 풀지 않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오후 4시 20분이 되었을 때 김태인 청년이 젖어왔다. 내가 떠나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가니 반갑기 그지없다.


29일. 월요일 아침이다. 흐린 날씨에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오후 1시가 지나서 빗소리는 멎었다. 운동하는 시간이다, 하산할 때를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모아둬야 한다. 다리 힘이 없으면 걷기가 불편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기에 혼자 왔던 길을 갈 때도 혼자의 힘으로 가야 한다. 걸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감사한 일이다.


며칠 전부터 산이 시끄러워졌다. 아랫마을 어른들과 부녀자들이 올라와 나무를 심는 일을 공동으로 하는 중이라고 한다. 잡목은 베어내고 침엽수 소나무 등은 새로 심는 작업을 하는 모습이 정겹다.


30일 고마운 청년 <형춘>이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이면 옆 방에서 조용히 내 귀에 들리지 않게 신경을 쓰며 밥을 먹는 <형춘>이. 이곳에서 제일 부러운 영혼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반찬은 두 가지다. 묵은 신 김칫국에 시어버린 무김치 쪽이 옛날 하얀 사발에 가득 담긴 밥을 쟁반에 받쳐 들고 가는 모습이 진지하다. 그렇게 먹으며 지내도 얼굴은 토실토실 살이 쪘으니 얼마나 부러운지. 하기야 아무 근심, 걱정을 모르는 환자 수준이니 이해를 하자 생각한다. 그럼에도 순결함을 간직한 착한 맘이다. 넓은 마당 청소는 물론 겨울철에 불을 때는 아궁이마다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맡아서 한다.


3월의 끝날이다.

차가운 바람이 참으로 싫어졌다. 처음 도착한 날 몸이 기억하는 흙바닥에서 길게 누워 잠을 청하던 힘겨웠던 씨름이 흔적으로 남았나 보다. 그래도 오늘은 바람 길을 피해 양지쪽에 앉아 햇빛을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흠뻑 햇빛에 따뜻해진 몸이 방에서 다시 적응을 해야겠지.

두려움과 걱정으로 시작한 1일의 금식이 삼십일 일째를 마치게 되었다. 남은 9일 마무리를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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