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실망을 낳고, 실망은 기대를 낳는다. 사람은 왜 기대하는가? 유용성(쾌락과 고통의 저울질)에 대한 관념이 근원적이라 생각한다. 인간-존재는 유용한 도구에게 애정의 형태로 마음을 쓴다. 그러나, 유용하지 못하게 된 도구는 어떠한가? 인간-존재는 그 쓰임새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 도구에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도구를 향했던 애정은 잊히고, 쉬이 버려진다. ‘유용하면 쓰이고, 유용하지 못하면 버려진다.’ 본능적인 사고방식이다. 한편, 어떤 존재가 유용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그에 마음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마 그 존재에게 쓰여진 마음이 ‘?-존재’와 공명해서이리라.
인간-존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용성만을 이유로 형성된 친밀함에서는, 서로에게 유용성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그 쓰임새를 상실한 인간에 대해서는 실망이 나타난다(‘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야’). 그러나, 어떤 인간관계는 유용성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연결감, 공통감은 ‘?-존재’와 공명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친말함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맺어진 관계는 결과적으로 유용성을 주지만, 유용성만을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닌 것이다.
전자에서 실망은 ‘버림’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나, 후자는 양상이 복잡하다. 실망은 마음 씀이 유용성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을 때, 유용성이 유용성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을 때 드러난다. 마음 씀 자체는 유용성보다 공통된 표상이 어렵기 때문에, 오해를 낳는 경우가 있다.
실망은 유용성의 측면을 강조하는 한편, ‘?-존재’는 그런 생각은 너무나 세속(世俗)의 관점이라고 항변한다. 유용성은 자기(自己)가 겪은 실망을 참으면 결과로 산출될 유용성과, 내가 그 실망을 돌려주었을 때 결과로 산출될 유용성을 비교하는 ‘저울질’을 요구한다. 그러나 ‘?-존재’는 배려의 형태로 타인에게 마음을 쓸 것을, 또 절도(節度) 있는 심경(心境)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한편, 이러한 심적 갈등의 양상은 유용성의 저하를 초래한다. ‘?-존재’의 항변은 점점 힘을 잃어가며, 유용성-저울질의 결과로 ‘버림’이 드러나는 경우가 존재한다(‘어쩔 수 없어’, '내가 힘들어').
‘?-존재’는 ‘찜찜함’의 양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를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유용성의 명령을 좇든, ‘?-존재’의 항변을 좇든, 모두 ‘인간다운’ 형태이다. 그 선택은 인간-존재에 달렸고, 그로 인한 책임 또한 전적으로 인간-존재에게 있는 셈이다. 인간은 모든 상황 속에서 자유를 가지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유용성의 명령에 따르더라도, ‘?-존재’의 항변에 마음을 쓰는 인간-존재는 아름답다. 어떤 실망이 드러나든, 어떤 기대가 이어지든, 모두 삶의 양식이다. ‘?-존재’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인간-존재는 아름답다. 사랑은 ‘서로 마음 씀’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음표-되기, 유용성의 저편, 마음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