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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Jun 22. 2024

아폴로의 천사들 : 발레의 역사


<아폴로의 천사들 – 발레의 역사>의 저자 제니퍼 호먼스가 서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발레 교습이 매우 권위적이었다고 회상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처음 발레를 배웠던 그 해를 떠올렸다. 학교 다닐 때에는 댄스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내가 어쩌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워낙 타고난 몸치였기에 무용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기에만 급급했다.  무용실 안에서 선생님의 지도는 당스데꼴(발레에서 지켜야하는 엄격한 규범과 원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왜?”라고 궁금해 한 적이 없고, “왜요?”라고 물어본 적도 없다. 다섯 가지 발 포지션 중에 3번 포지션은 왜 하지 않는 것인지, 앙셴느망은 어째서 사선 방향으로 하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다. 우리는 러시아 발레를 배우고 있다고 했을 때 그런가보다 했을 뿐 다른 세상의 발레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양한 발레 교육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책의 저자가 발레는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전해지는 스토리텔링의 예술이고 고정된 교과서가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선생님이 말과 몸짓으로 전달하는 것에 따라 움직임과 태도로 체득했다. 발레에서도 클래식 연주자들이 어느 스승에게 ‘사사’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누구에게 ‘사사’받은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위대한 스승에게 발레를 사사받은 제자들은 전공 후에도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만큼 스승과 제자의 유대관계가 깊다. 이는 취미로 발레를 배웠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룹으로 일반 클래스를 받았을 때와는 다르게 공연을 위한 작품을 장기간 연습하거나 개인 교습을 받기라도 하면 선생님과 제자들은 몸짓과 몸짓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감정이 흐른다. 결국 사람이 가르치고 사람이 배우는 것이니까.     


오랜 기간의 발레 권태기를 극복하고 제 2의 발레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발레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서서히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탄생시켰고 프랑스에서 꽃을 피웠으며 러시아에서 완성했다.”는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이 무렵부터 궁금한 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발레가 꽃을 피웠다면 이탈리아 발레는 잠자고 있었을까?‘, ’러시아 말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누구에 의해 발레가 수입되었을까? 독일은? 오스트리아는? 북유럽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호기심 나무에 질문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발레 작품 감상이 확장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생각주머니가 또 자라기 시작했다. ’어째서 로열발레단은 순수 영국인들은 거의 없고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더 많은 걸까?‘     


본인부터가 춤을 잘 췄던 루이 14세는 왕립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해 춤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발레 마스터 피에르 보샹은 발레의 기본 포지션을 정립하고 메소드를 발전시키고 악보의 음표처럼 춤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발레를 체계화하고 제도화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발레를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생각해 귀족들이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 춤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왕권 시대에 귀족들은 발레를 펜싱, 승마와 함께 배워 평화시에는 궁정에서 벨당스(아름다운 춤, 예법으로서의 발레)를 췄고, 유사시에 대비해 춤을 통해 신체를 연마했다. 이는 훗날 제정 러시아가 이미 프랑스에서는 직업 무용수들이 추는 춤으로 진화되어 사라져버린 교육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러시아 귀족들이 군사 훈련과 함께 발레 교육을 받는 처음에는 예술이라기보다는 벨당스로서 발레를 도입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발레 교육을 군사 훈련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전통은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의 발레 학교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소련의 발레 무용수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러니 좀 더 다르게 생각한 루돌프 누레예프같은 무용수는 언제나 그들에게는 품행 불량처럼 보였던 것이다.     


프랑스 왕립 무용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표준어로 만든지 50년이 지난 후 최초의 왕립 무용 학교가 세워지면서 발레는 직업 무용수들로 대체되었다. 학교의 커리큘럼도 더욱 전문화되면서 뛰어난 무용수들이 대거 배출되기 시작했고, 전유럽으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발레를 배우겠다고 파리로 유학을 온 외국인 무용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외국인 무용수들 중에는 훗날 덴마크 발레를 발전시킨 오귀스트 부르농빌이 있었다.     


발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덴마크에 발레라는 춤을 확고히 새겨넣은 부르농빌의 발레 스타일은 확실히 프랑스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공기같은 움직임과 빠른 방향 전환, 곡선처럼 부드러운 폴드브라, 가볍고 경쾌한 스텝들이 많은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르농빌 스타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는 무척 생소한 덴마크 발레가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여러 영상들을 찾아 보았다. 작품 속 여성의 이미지를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면서 작품 전반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던 프랑스의 낭만주의 발레와는 다르게 부르농빌 스타일은 감정이 과잉되어있지 않았고 특별히 악센트를 주는 동작들이 없었으며 비록 로맨틱 튜튜를 입었을지라도 프랑스 발레에 비하면 발레리나들의 여성미를 강조한 편은 아니었다. 모든 동작들을 시원시원하게 구사하는 러시아 발레, 배우들처럼 연기하는 영국 발레, 역동적인 미국 발레에 익숙한 나에게는 다소 슴슴하고 단백하게 느껴졌다. 전쟁, 혁명과 같은 격동기가 없이 이어져 온 정치적 안정은 표준어가 된 프랑스 발레가 독일,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에 전파되고, 나름대로 계보를 형성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무용수들이 곡예 수준의 테크닉으로 다른 유럽 국가, 러시아에까지 넘어가 관중들을 홀릭시키고, 또 프랑스 발레 마스터들이 러시아에 가서 고전 발레의 형식을 만들고, 다시 니진스키같은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이 파리에 와서 온갖 스캔들을 터뜨리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하는 동안에 덴마크 발레가 고요히 부르농빌 스타일을 박물관급으로 박제시키면서 전통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게  했다는 점이다. 이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 그대로 지켜지면서 이미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에서는 사라져버린 춤 스타일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후 발레의 세계화로 발레 무용수와 안무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덴마크 발레가 공개되었는데, 그 변하지 않은 순수함에 외국의 발레 관계자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tqTM7RNG1PbM2pvXnLxz0Sy7zkOglZe3&si=wX3Z15tgpYurBbSu


세습왕조에서 성문화된 프랑스 발레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귀족같은 이미지를 던져버린 순간 작품 속에서의 남성 무용수들의 이미지와 위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발레리노들의 신체조건과 외모에 따라 당쇠르 노블(왕자님같은 외모를 지닌 제 1무용수), 데미 캐릭터(뛰어난 테크니션), 코미크(감초 역할)로 나뉘어 작품 속에서 실제 사회의 계층을 표현했으며 데미 캐릭터와 코미크 무용수들이 분위기를 다 띄워주고 나면 노블에 해당하는 무용수가 등장해 점잖게 춤을 췄으나 이제는 당쇠르 노블같은 발레리노보다는 힘있게 회전하고, 높이 도약하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발레리노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남성 비르투오소 시대를 연 발레리노 오귀스트 베스트리스


발레리노들의 흔들리는 위계질서는 곧 발레 클래스의 수업 내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발레 학교 교사들은 온갖 연구와 실험을 하면서 기존의 수업 방식을 바꾸는 등 메소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움직임을 분석하고 분해하면서 고관절부터 외전하는 턴아웃으로 바뀌었고, 포인트 워크를 연구했으며 에튀튜드와 피루엣 같은 현란한 테크닉들이 더해졌다. 무용실 벽면에는 발레 바가 설치되었고, 점차 발레 클래스의 순서가 체계적으로 자리가 잡히면서 19세기에는 오늘날의 발레 클래스 순서와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벽면에 거울과 발레바가 설치된 무용실, 에드가 드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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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프랑스에서 발레가 뿌리를 내리는 동안 이탈리아 발레도 잠자고 있지는 않았다. 발레를 탄생시켜 프랑스로 수출한 이탈리아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발레가 자라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탈리아 무용수들이 팬터마임에 강하고 곡예 수준의 테크닉을 보유한 것으로 유럽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포인트 워크도 원래는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많았던 이탈리아 무용수들이 관객들 앞에서 곡예 수준으로 재주 부렸던 것을 마리 탈리오니가 고상하게 정제해서 천상의 언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희부연 가스등불 아래 날개 달린 의상을 입고 불면 곧 날아갈 것 같은 이미지로 공중을 떠다니듯 온 무대 위를 가볍게 돌아다니면서 파리의 관객들의 넋을 쏙 빼놓으며 프랑스 낭만주의 발레의 시작을 알린 마리 탈리오니도 이탈리아 출신이다. 이런 마리 탈리오니를 만든 아버지 필리포 탈리오니도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라 이탈리아에서 발레를 배웠던 이탈리아 계보를 잇는 무용수였다. (잠시 프랑스의 옛 춤을 배우고,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합류한 경력은 있었다.) 마리 탈리오니가 발끝으로 서서 가볍게 우아하게 춘 포인트 워크는 아버지인 필리포 탈리오니한테서 아주 혹독하게 발레 훈련을 받았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의 취향은 프랑스인들과는 전혀 달라서 공기같은 이미지의 발레리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름대로 문화부심이 높았던 이탈리아 발레 마스터들은 <라 실피드>와 <지젤>같은 낭만주의 작품을 이탈리아 식으로 MSG를 첨가해 가냘프고 판타지같은 이미지보다는 온갖 테크닉을 다 넣은 자체 버전으로 제작해버렸다. 비록 프랑스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정리가 안 되어있던 발레를 체계화하고 제도화해서 뿌리를 내리게 하고 발전을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발레를 탄생시키고 발레의 정체성인 포인트 워크를 시작한 이탈리아야말로 확실히 발레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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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들에게는 발레도 있었지만 오페라도 있었다. 오페라에서까지 발레를 집어넣은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에서 오페라와 발레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였다.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오페라 막간에 발레를 추긴 했지만 오페라 내용 안에 발레를 끼워맞춘 프랑스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 막간에 공연되는 발레조차도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었다. 더욱이 자신들만의 개성과 활기, 자유와 방종이 섞인 역동성과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 무용수들이었기에 발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고 자신만만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발레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프랑스처럼 중앙집권국가가 아니었고, 여러 공국들로 흩어져있다보니 각자의 개성과 창조성을 지닐 수는 있었으나 지속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주변 국가들로 뛰어난 이탈리아 무용수들의 재능 유출은 이탈리아 안에서 발레가 좀 더 성장하는 데에 불리했다. 결국 정치적 통합이 늦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의 발레는 그 역사가 유구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국가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밀리게 되었다. 점차 발레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밀려나면서 그 자리를 오페라와 음악이 차지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탈리아의 뛰어난 무용수들은 전 유럽으로 자신들의 재능을 유출하면서 발레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제정 러시아에서 고전 발레의 형식을 완성한 마리우스 프티파는 프랑스인이지만 프티파에게 영감을 준 무용수들은 현란한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출신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발레의 테크닉들은 거의 이탈리아 무용수들에게서 나왔다. 프티파의 고전 발레 작품에서 발레리나들이 비르투오소로 거듭날 수 있게 한 클래식 튜튜 역시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고 있던 이탈리아 발레리나들이 먼저 입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레 선생님인 엔리코 체케티 역시 이탈리아 출신이다. 체케티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가르치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인품도 뛰어났던 체케티 곁에는 언제나 발레를 배우겠다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녔다. 러시아, 영국, 미국, 이탈리아를 오고 가며 발레를 가르쳤던 체케티. 그의 제자 중에는 안나 파블로바와 바슬라프 니진스키도 있었다.      


그럼에도 '발레'하면 자연스럽게 러시아를 떠올리는 이유는 마리우스 프티파가 러시아에서 고전 발레의 형식을 완성했고, 그렇게 완성된 고전 발레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적으로 각 발레단의 기본 레퍼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발레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는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뒤늦게 발레 붐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무용수들과 발레 마스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특히 발레 마스터는 프랑스인들을 선호했고, 이미 프티파보다 한 발 앞서 제국의 궁정에서 자리를 잡았던 쥘 페로에 이어 프티파도 황실과 귀족들의 비호 아래 창작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러시아는 프티파에게 풍부한 자원을 지원하면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했고, 프티파는 러시아 황실과 제극 극장의 훌륭한 조신이 되었다. 프티파는 2인무를 그랑 파드 되로 확장하고, 기분 전환을 뜻하는 디베르티스망을 고전 발레의 문법으로 만들면서 낭만 발레의 대표적인 작품 <지젤>을 업그레이드해 발표했으며 <파라오의 딸>, <해적>을 창작했다. 연이어 만든 <돈키호테>는 오늘날에도 발레 입문 작품으로 손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고, 대체로 호불호가 없어서 왠만한 발레단의 기본 레퍼토리가 되었다. <라 바야데르>에서는 백색 군무인 '발레 블랑'으로 발레리나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우스 프티파'하면 딱 떠오르는 작품들은 따로 있다. 바로 프티파가 안무한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뛰어난 음악적 상상력과 천재성은 프티파가 도전 의식을 가지고 발레 안무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의 발레 음악과는 전혀 다른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에 프티파는 안무를 만들기 위해 소재를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프티파는 이탈리아의 발레 테크닉을 인용하되 그들의 과장과 열정을 정제해서 세련되고 우아한 고전 발레의 언어로 변형했다. 잘 짜여진 구성과 관현악의 묘미, 우아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무용수들의 움직이는 방식을 변화시켜 몸짓과 춤이 이음매 없이 음악과 하나가 되어 흘러갔다. 프티파의 춤 없이도 그 자체로도 훌륭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영속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프티파가 위대한 안무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차이코프스키 덕분이었고, 훗날 프티파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감사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유려하고 서정적인 선율에 이탈리아 무용수들의 테크닉에서 빌려온 발레 동작들을 시적인 은유로 변환시켜 수준 높은 발레 페리(ballet faerie, 몽환 발레)를 만들었던 마리우스 프티파. 그러나 이 엄청난 작품들을 프티파 혼자 만들었을까. 아니다. 마치 20세기의 유능한 안무가 제롬 로빈스가 조지 발란신 그늘 아래에 있었던 게 비극이었던 것처럼 프티파의 조수로 일했던 탓에 이름이 가려졌던 천재 안무가 레프 이바노프가 바로 그 숨은 공신이었다. 이바노프가 안무한 <호두까기 인형>의 눈송이 왈츠, 사탕 요정의 춤 등은 프티파의 정형화된 언어와는 거리가 먼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백조의 호수>에서 이바노프가 안무한 백조들의 군무는 궁정 파티 장면을 만든 프티파의 안무와 대조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바노프가 창조한 백조들의 춤은 유기적으로 조각되었다, 모였다, 흩어졌다, 재결합되면서 동선이 아무리 복잡해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정연한 군무로 발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코르 드 발레가 되었다.

https://youtu.be/DPps66YtEsU?si=u3h2D7YtL9AfMzjY



지금까지 프랑스인 프티파가 발레 작품을 안무하고, 작품의 주연은 이탈리아 무용수들이 차지하고 나머지는 러시아인들이 채웠던 러시아 발레는 순수 러시아 출신이었던 레프 이바노프를 시작으로 점차 토종 러시아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러시아의 차세대 무용수들은 위대한 발레 스타들을 대거 탄생시켰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바슬라프 니진스키, 미하일 포킨이 있었고, 바가노바 메소드를 만든 아그리피나 바가노바도 있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tqTM7RNG1PbhuXy9sT5EmscUjdQ7ernx&si=Ugfsyw2ErC9pUgQQ


1909~1929년까지 약 20년이라는 기간동안 전유럽을 뒤흔든 발레 뤼스는 전통을 답습하는 러시아 황실 발레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해 모던 발레의 토대를 이룬 발레의 역사를 바꾼 발레단이다. 러시아 발레단이라는 뜻을 지닌 발레 뤼스는 발레리나들의 공기같은 움직임과 우아한 발레 포즈에 경도되어 있던 파리의 관객들을 충격에 몰아넣은 그러나 정작 러시아에서는 단한번도 공연을 하지 않은 발레단이었다.


발레뤼스의 무용수들은 신체 조건도 러시아 황실 발레단의 무용수들과 달랐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미하일 포킨, 바슬라프 니진스키 등 디아길레프 호에 탑승한 발레 무용수들은 길고 고르게 발달된 근육과 은은한 관능성을 지녔다. 이는 당시 러시아 황실 발레단을 장악했던 마틸다 크셰신스카의 풍만하고 요염한 매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발레 훈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미래의 디아길레프 무용수들의 대부분을 가르쳤던 엔리코 체케티는 이후에도 발레 뤼스와 함께 유럽을 누볐다. 그들은 체케티의 지도하에 더 나긋나긋하면서 유연해졌고 더 이상 묘기처럼 발레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가진 기술적인 능력을 스스로의 신체에 조각하는 한편 유려한 움직임들을 계발하는 데에 사용했다. 카르사비나의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관능적인 매력, 파블로바의 물결치는 듯이 빛나는 날카로운 연약함, 니진스키의 동물적인 움직임은 미하일 포킨의 혁신적인 안무에서 숨겨진 매력과 에너지를 불러냈으며 쇠퇴해갔던 유럽 발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하일 포킨 안무의 장미의 정령에서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바슬라프 니진스키


발레 뤼스의 무용수들은 디아길레프의 지도하에 지적인 활동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풍부한 교양과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발레리나 카르사비나는 후일 회고록에서 자신의 팬들은 치렁치렁하게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아니라 학생과 지식인들이었다고 썼다. 특히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의 관리 감독하에 미술관 관람과 음악가, 화가, 작가들의 타 예술분야의 사회에 소개되었고 덕분에 니진스키의 예술적 지평은 헤어릴 수 없이 넓어졌다. 후일 디아길레프가 발란신을 발탁했을 때 추진력이 좋았던 이 예술 기획자는 니진스키에게 했던 것처럼 발란신의 교육을 손수 맡았는데 이 젊은 안무가에게 유럽 회화와 예술을 공부하도록 압박했다. 이런 강요에 발란신은 한 이탈리아 성당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르네상스 화가 페루지노의 그림을 응시해야했고, 디아길레프의 강압에 처음에는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길이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모리스 라벨, 에릭 사티,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장 콕토, 가브리엘 샤넬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발레 뤼스에 열광했으며 실제로 작품을 창작하는데에 참여했다. 이전의 발레 작품들은 수장격인 안무가가 대부분의 춤을 만들고 차석 안무가가 보조를 했다면 발레 뤼스의 창작 과정은 처음부터 집단 지성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협의해서 만든 최초의 집단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포킨의 <불새>, <페트루슈카>는 발레 뤼스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 <봄의 제전>은 비록 초연 당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레 뤼스의 발레 작품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점점 더 국제적으로 변해가면서 20세기의 음악, 미술, 발레 의상 등 다양한 분야로 그 영향력이 뻗어나갔다.


하지만 디아길레프가 꼭 지켰던 원칙이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안무가만큼은 반드시 러시아 출신이어야 했다. 디아길레프는 절대 유럽 출신의 발레 마스터들과 작업하지 않았다. 포킨과 니진스키가 사라지자 그는 러시아 출신인 레오니드 마신을 고용했으며 1925년에는 조지 발란신이 유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내기도 했다. 디아길레프는 늘 하던대로 새로 고용된 젊은 안무가들에게 다른 분야의 예술에 빠지도록 몰아넣었다. 레오니드 마신은 디아길레프의 지원하에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에릭 사티가 음악을 맡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한 작품 <퍼레이드>의 안무를 창작했다. 디아길레프가 발탁한 걸출한 안무가 발란신 역시 발레 뤼스를 위해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샤넬이 디자인한 발레 의상을 입고 추는 발레 <아폴로>는 발란신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움직임들로 가득찬 아폴로와 뮤즈들의 춤으로 오늘날에 감상해도 음악, 의상 디자인, 안무 등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발레 작품이다.


디아길레프가 발레사에 남긴 유산은 엄청나다. 러시아 출신이었던 그는 러시아 무용수들을 유럽으로 데려와 아방가르드 무용의 물꼬를 터서 모더니즘의 서막을 열었다. 또한 포킨, 니진스키, 마신, 발란신 등 유능한 안무가들이 동시대 작곡가들과 협업하도록 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미술가, 패션 디자이너들도 끌어들여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그려나갔다. 디아길레프의 유산은 영국 발레의 초석을 세운 영국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엘리트들은 영국 발레를 만드는데에 발레 뤼스에서도 실마리를 얻었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tqTM7RNG1Pb0WTB-QIP5mrkBPSr4QJiY&si=nfjmN3UaijoZNb7M



발레 강대국들이 자신들만의 발레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었을 때 발레를 어디까지나 수입 예술로만 생각해왔던 영국이 20세기 중반부터 불쑥 튀어나오더니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영국이 단시간 내에 발레 지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발레를 영국문화와 융화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 발레 작품들을 수집해 자체 버전으로 재창조해 만들었고, 이러한 창조력이 국민 예술로 거듭나면서 프레데릭 애슈턴, 마고 폰테인같은 발레 예술가들은 국민 스타가 되었다. 영국 발레의 유파를 형성하는 데에 타마라 카르사비나같은 러시아 망명 무용수들과 영국에서도 잠시 뿌리를 내렸던 발레 선생님 엔리코 체케티의 영향도 있었고, 무대 예술에서도 기존의 유명 발레 작품들을 모아서 그대로 복제를 한 것이 아니라 영국적인 색깔을 입혀 재창조를 했다는 점이 오히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가장 영국적인 색채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곧이어 발레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발레가 자라지 못했던 독일에게 발레의 역사가 짧은 영국이 수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https://youtu.be/SXnRxAO15gI?si=uK6-enY-SgGb6vdI

동영상 설명 : 영국 발레의 초석을 세운 니넷 디 밸루아는 프티파의 고전 발레 작품의 안무를 수집하기 위해 영국 내의 러시아 망명 무용수들을 찾아서 안무를 기록하는 등 여러가지로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나서 무용수들의 몸이 기억하도록 집중훈련을 시키면서 단원들이 순수 영국인으로서 민족주의적인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시기의 영국 무용수들은 테크닉은 약했을지라도 무대에서는 러시아 무용수들 못지 않게 자신감과 매력이 넘쳤다. 결국 단원들이 순수 영국인으로서 러시아인들을 능가하기를 바랐던 디 밸루아의 바람은 이루어졌고 이후 수십년간 영국 발레의 기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곧이어 디 밸루아가 날개 밑으로 거둔 발레리나가 있었는데, 바로 장차 영국의 국민 발레리나가 될 마고 폰테인이었다.




과거 독일의 공국들은 발레단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관된 스타일이나 전통의 부재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독일은 제대로 발레를 키우기 위해 해외의 발레 예술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영국, 미국의 안무가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로열발레단의 무용수였던 존 크랑코가 있었고 뒤를 이어 영국의 안무가 케네스 맥밀란이 독일에 정착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로열발레단에서 활동하다가 어느 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정착한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발레의 역사는 엄청 오래되었으나 그 흔적이 미미했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존 크랑코이다. 한국인들한테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평생 몸담고 있었던 발레단으로 매우 친숙한 발레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세계적인 발레단이 된 것은 불과 몇 십년 밖에 되지 않는다. 존 크랑코가 유럽의 이름없는 발레단을 세계적인 무용의 중심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발레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어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상주 안무가로서 첫 작품으로 제작했더니 빅히트를 치면서 드라마 발레의 신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러시아의 대문호 퓨수킨의 운문소설을 발레 작품 <오네긴>으로 만들면서 오늘날까지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대표하는 발레 작품으로 각인시켜 놓았다. 공주님과 왕자님의 러브 스토리와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 작품 속에 담긴 서사를 음악에 담긴 감정과 함께 오직 움직임만으로 전달하는 드라마 발레는 다른 장르의 발레 작품보다 훨씬 풍부한 감정 연기를 해야 하고 입체적인 인물 표현을 위해 무용수들은 배우처럼 연기를 해야 하기에 관객들도 쉽게 감정이입이 되어 동화가 된다.     


하지만 존 크랑코가 드라마 발레를 처음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의 ’드람 발레‘가 드라마 발레의 시초이다. 소련 최초의 드람발레는 바로 공연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아 프로코피예프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우여곡절 끝에 키로프 극장에서 초연되었던 이 작품은 이후 볼쇼이에서도 무대 위에 올리면서 볼쇼이 발레단의 메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후 1956년 예술 교류의 일환으로 볼쇼이 발레단이 이 작품으로 영국에 등장했던 날 냉전의 적대감은 사라지고 영국의 관객들은 스펙터클한 작품과 발레리나 갈리나 울리노바의 브라부라한 춤실력에 압도되었다. 이후 존 크랑코가 이 작품을 자체 버전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쏙 빼고, 이야기 속의 인간 군상과 인물들의 삶을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드라마 발레로 전환했다. 드람 발레가 드라마 발레가 된 것이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0370CFF534F3AE54&si=sgc4_eK7GSmmpuuV



과거 소련이 제작한 발레 작품들 중에 좋은 작품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Brabura(고도의 테크닉)한 발레 무용수들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1934년에 출범한 소련 발레는 키로프가 좋은 교육과 훈련으로 최고의 무용수들을 키워내면 소련 최고의 문화기관인 볼쇼이로 무용수들이 흘러들어갔다. 즉 키로프 발레학교에서 러시아식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무용수들을 배출하면 언제나 세계 무대에 그들을 선보이는 것은 볼쇼이였다. 소련 발레가 국가적인 중대사 그 자체가 되도록 만든 이 중에는 매우 뛰어난 발레 교사 아그리피나 바가노바의 공도 매우 컸다.

발레 무용수로서보다도 교사로서 더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바가노바는 레닌그라드(키로프) 유파와 발레 스타일을 체계화해 교재를 만들고 발레를 과학으로 접근했다. 해부학에 역행하는 발레를 기술적으로 접근, 분석해 그 어느 메소드보다도 관절의 가동범위를 가장 많이 넓혔으며 상체와 하체, 시선의 전체적인 조화까지 강조함으로써 테크닉과 예술성의 갭을 좁혔다. 바가노바 교육법에서 모든 움직임들은 감정으로 충만해야 했고 이것은 곧 드람 발레에 딱 들어맞았다.


발레가 국가적인 문제 그 자체였던 소련에서는 될 성 부른 나무들을 키우기 위해 산간벽지까지 찾아가 발굴한 떡잎들을 발레 교육을 시키면서 군사훈련 하듯이 교육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복종만 강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후원자가 된 것이다. 복종을 강요하되 국가에서 발레 학교 학생들에게 용돈과 생활비, 의상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했다. 게다가 발레 무용수로서 스타가 되면 소련의 일반 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발레 무용수들은 국가에 충성하면서 철의 단련을 했다. 게다가 점차 볼쇼이가 더 이상 키로프에 의지하지 않게 되면서 우아한 스타일보다는 더 원초적이고 대담하고 운동선수같은 무용수들이 무대를 장악했다. 이렇게 단련된 브라부라한 무용수들이 많았기에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남자같은 근육으로 우람하게 춤을 출 수 있었고,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소련 발레의 절정인 <스파르타쿠스>는 초현실, 비현실적인 스토리가 아닌 역사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급 타파, 인민들의 이야기가 들어간 대표적인 ’드람 발레‘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국에서 발레가 쉽게 정착하지 못했던 이유가 영국인들의 실용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귀족들도 겉치레를 싫어했기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에 몰려있으면서 발레 공연을 했던 프랑스 귀족들과는 다르게 영국의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골 영지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20세기 전까지 영국에서 발레는 어디까지나 허례의식으로 가득찬 프랑스적인 예술로 취급을 했고, 발레 교육법이라는 것도 있긴 했지만 근본이 없는 발레 교육이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의 한 망명 무용수가 영국의 한 신문에 쓴 영국 발레 교육에 대한 비평문에 그제서야 영국인들이 발레 교육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한 것처럼 예술로서의 발레도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들이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과거의 유물로 취급받기 시작하면서 영향력이 꺼져가 맥을 못추던 유럽 발레의 흐름에 전환기를 몰고와 발레의 형식을 파괴해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렸던 발레 뤼스의 성공적인 모습은 영국의 엘리트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러시아 발레를 숭배한 영국의 엘리트들 중에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블룸즈버리 그룹(런던의 문화 엘리트 집단)의 핵심 멤버로서 영국 발레의 창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집단 지성인들의 모임인 카마르고 협회를 설립해 미래의 로열 발레단의 창립자들인 니넷 디 밸루아와 프레데릭 애슈턴이 합류했다.


니넷 디 밸루아는 1931년에 빅-웰스 발레단을 창단했다. 이후 이 단체는 1940년에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으로 개명했고 1957년에는 로열 발레단으로 인가를 받았다. 지략과 야심을 겸비했던 디 밸루아는 재능있는 예술가를 알아보는 눈도 있어 애슈턴을 상임 안무가로, 아직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마고 폰테인을 주역 무용수로 고용했다. 디 밸루아라는 든든한 막후세력을 등에 업은 애슈턴은 체케티의 앙셴느망들을 통째로 흡수한 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미해 왕성한 창조력을 보였고 폰테인은 애슈턴의 발레와 함께 훨훨 날았다.

폰테인의 명성은 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더욱 높아졌다. 군인들과 시민들을 위해 공습과 폭명탄을 뚫고 극장과 공원에서 춤췄던 폰테인의 변함없는 인내와 용기는 전시호황을 겪으면서 영국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이후 영국 발레는 러시아인들처럼 국가가 공식 승인한 발레 학교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인들에게 발레는 연극처럼 당연히 갖춰야 할 소양이 되었다. 그렇다면 보통은 전성기를 누린 후에는 서서히 쇠퇴를 했던 다른 유럽 국가의 발레와는 달리 어떻게 로열 발레단은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여전히 활기를 띄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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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 메소드를 로열 발레스쿨과 로열 발레단이 흡수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메소드가 로열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전인교육이자 일종의 자격증이기도 한 RAD 메소드를 고급단계까지 이수했다고 해서 로열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열 발레단이 21세기에도 활기를 띠고 있는 이유는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에 있다. 로열발레단이 초창기에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으로 뿌리를 내렸던 시대에는 영국적인 색채로 채색해 단숨에 국민 예술로 거듭났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로열 발레단에서 제작한 영상물을 보면 단원들의 채용 기준이 오늘날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국 발레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안무가들과 무용수들은 갔고 남은 자들은 영국 발레가 과거의 유물로 퇴행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이후 로열 발레단측은 새로운 활력을 위해 단원들의 채용 기준을 세계로 넓혔다. 재능있는 무용수들을 알아보는 데에 귀재인 로열 발레단 임원들은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재능이 있으면 무용수들을 채용하고 해외 발레 스타들한테도 러브콜을 보내 영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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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 허례의식으로 가득차 보이는 발레를 오글거려했듯이 미국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호화롭고 귀족적인 궁정 예술이었던 발레는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청교도 사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국가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상업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거리를 두었다. 미국인들도 영국인들처럼 발레를 수입예술로 생각했고, 그마저도 쇼, 뮤지컬 등을 통해 끼어서 들어온 대중문화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19세기 후반의 미국인들은 곡예수준의 묘기를 부린 이탈리아 무용수들에 열광을 했다. 그러더니 20세기에는 미국에 들어온 러시아 무용수들을 보고 발레에 대한 생각을 180도로 바꾸었다. 미국에 발레의 씨앗을 뿌린 러시아 망명 무용수들도 미국인들의 발레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데에 일조를 했다. 러시아 망명 무용수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발레의 씨앗을 뿌려 뿌리내리게 했다.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들이 미국 발레의 초석을 다졌다면 제롬 로빈스, 앤서니 튜더 등의 유능한 안무가들과 조발란신과 같은 위대한 안무가의 영입은 미국 발레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급부상하게 만들었다.

     

발레 황무지였던 미국에서 발레를 엄청 사랑했던 발레 애호가가 있었다. 야심만만한 사람이기도 했던 그 사람은 미국 발레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세우고 진짜로 실행에 옮겼다. 바로 유럽에 있던 조지 발란신을 미국으로 끌어들인 링컨 커스틴이다. 초면부터 미국 발레를 만들겠다고 말한 링컨 커스틴에게 발란신이 한 대답이 매우 유명하다. “일단 학교부터.”     


사실 발란신은 안무가이지 교육자가 아니다. 체케티, 바가노바처럼 학생들의 기본기와 해부학에 근거한 발레의 테크닉과 원리를 교육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발란신은 링컨 커스틴에게 발레단 설립보다는 학교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쳤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아메리칸 발레 학교(SAB)를 설립한 후 뉴욕시티발레단(NYCB)을 만들어 발레 학교 학생들을 발레단에서 흡수하고 발레단이 상주하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극장(링컨센터) 체제를 정착시켜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들이 아메리칸 발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뉴욕시티발레단의 상임 안무가인 발란신이 그 학생들을 흡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시 훈련시켰다. 이게 오늘날 발란신 메소드라고 불리우는 발란신 스타일이다. 발란신은 발레에서 꼭 지켜야 하는 전통적인 당스데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맞는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도록 무용수들을 훈련시켰다. 발란신의 발레 클래스는 곧 무대 위에 오를 작품이었다.      


발란신과 커스틴이 세운 학교와 발레단은 큰 반향을 일으켜 드디어 미국에서도 발레 붐이 일어났다. 발란신은 미국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미디어나 각종 언론 매체를 적극 활용했으며 자신의 지적 재산들도 지역 발레단에 공짜로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뿐만 아니라 발란신은 미국 전역을 십년간 돌면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인재들을 발굴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드디어 포드 재단이 거액의 후원금을 투척하게 만들었고, 미국 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tqTM7RNG1PaRzGVLi7y-eESea8jo5-eZ&si=bcsqVNIZBiyJSd5j


저자는 발란신의 유산이 어마어마했다는 글로 미국 발레에 대한 글을 마무리짓고 있다. 발란신이 발레에서 줄거리를 없앴기 때문에 길고 긴 발레의 역사에서 수많은 안무가들을 괴롭혔던 팬터마임에 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발란신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음악이고, 시각적이었기 때문에 춤 자체로 볼 수 있는 예술이었고, 그토록 관능적이면서도 시적인 작품들을 창작한 발란신을 자기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북엔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라 실피드>와 <지젤>은 북엔드이다.”, “<세레나데>와 <아다지오 라멘토소>는 북엔드였다. 발란신은 자신의 미국인으로서의 삶의 시작과 끝에 차이코프스키에게로 돌아갔다.” 저자가 본문에서 자주 사용한 ’북엔드‘라는 표현은 이 책의 제목에도 해당이 되며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아폴로와 천사들을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레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에 있다고 본 것이다. 발레를 탄생시킨 이탈리아인들이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팬터마임들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연극과 신화에 기반한 연기였으니 저자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팬터마임 뿐만 아니라 발레의 대본을 쓸 때에도 그리스, 로마 예술에 대한 로망을 상상해서 재창조한 내용들 위주였다.     


이탈리아에서 싹을 틔운 발레가 프랑스로 건너가 표준어가 되고 다시 각 국가별로 방언이 되어 퍼진 발레는 각 시대별로, 나라별로 아폴로와 천사들이 있었다. 아폴로는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하고 세계 최초의 발레리노 루이 14세는 자신이 직접 태양왕이 되었다. 또 '발레 닥시옹(오직 춤으로만 스토리를 표현)'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계몽주의 시대의 발레 마스터 장 조르주 노베르를 비롯해 엔리코 체케티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유파를 형성한 카를로 블라시스 등 각 시대마다 존재하면서 춤을 위한 각종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연구. 필리포 탈리오니, 쥘 페로, 프티파 형제처럼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하고 발레 뤼스처럼 보수적인 답습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혁신을 일으켜 발레를 발전시킨 예술가들이기도 했다. 발란신은 <아폴로>라는 작품을 만든 아폴로이기도 했으며 그의 천사들은 아폴로의 생각을 춤으로 표현했다.


발레리나 출신이었던 저자는 무용수로서 은퇴한 이후 발레 역사가이자 비평가로 변신해 <아폴로의 천사들 : 발레의 역사>라는 거대한 문화사책을 썼다. 발레를 주제로 한 이 방대한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난 자료수집과 연구를 했음을 밝히고 있다. 나 또한 저자가 안내하는 기나긴 여정을 함께 따라가면서 발레가 전파되어 이동을 한 경로를 따라 머릿속으로 발레 지도를 그려나갔고, 각 시대별로 존재하면서 발레를 발전시킨 아폴로와 그의 천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 동안에 발레에 대해 궁금했던 호기심들을 모두 해소할 수 있었다.  


춤이라는 것 자체가 추는 순간 공중으로 사라지는 예술이다보니 그 옛날에는 춤보존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문자화하기 힘든 춤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직접 전수를 받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니 저자의 말처럼 춤은 스토리텔링의 예술이다. 보존이 힘든 춤을 추상적인 기호로 기록하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도 여전히 후대의 예술가들이 기록된 춤을 해독을 할 수 있느냐의 또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또 오늘날처럼 영상기록이 발전한 시대에도 춤을 기록한 순간 무용수들이 가진 이미지까지 기록되어 고정되어버리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기록하기에 한계가 있는 예술이다보니 옛날부터 소실된 작품들이 많았고 남아있는 작품들도 원형 그대로라고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을터. 심지어 발란신은 20세기의 안무가인데도 그가 창작한 400여편이 넘는 작품들중에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살아남은 게 별로 없다고 한다. 음악에 비해 남아있는 레퍼토리가 훨씬 적은 발레. 그 기나긴 발레의 역사 속에 담긴 서사들을  발자취만이라도 따라가며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너무나 좋았고 행복했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직접 춤을 췄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들이 많아서도 좋았다. 어린 시절 러시아 출신의 무용수에게 발레 교습을 받았던 인상을 회상하는 부분이나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한 시각, 무용수로서 춤추는 순간에 모든 게 맞아떨어졌을 때에 느끼는 희열과 고양된 감정에 대한 표현들은 직접 춤을 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일 조화와 음악성, 근육적 자극과 타이밍이 정확히 맞으면 다음은 육체가 맡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와 음악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삶을 보냈다.”

“발레를 미국인의 마음과 육체로 옮겨 심는 긴 과정이 시작된 것은 그들(러시아 망명 무용수들)과 학생들의 땀투성이 접촉을 통해서였다.”, 와 같이 저자 자신이 무용수로서 경험한 부분들을 녹여낸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들로 인해 눈물이 맺혔다.


나에게도 발레는 삶의 한 부분이다. 어쩌다 발레를 배웠던 그 해부터 발레는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전까지 발레 생각을 했으며 발레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을 했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노력했던 시간들, 구슬땀을 흘려가며 연습했던 나날들,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웃고 즐겁게 배웠던 시간들, 해냈을 때의 성취감과 해방감은 약 2년간에 걸친 발레 권태기를 겪는 동안에도 계속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결국 발레가 잊혀지질 않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다시 발레와 함께 인생을 그려나가고 있다.      

발레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첫 해에는 수업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2년차가 되었을 때부터는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바가노바 메소드라도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서 같은 자세도 조금씩 다르게 가르치고, 자세 교정을 해주시는 포인트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 글의 앞부분에 쓴 것처럼 발레에는 고정된 교과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위대한 발레 마스터들이 발레의 초석을 다지고 나면 그 제자들은 언제나 표본으로 만들어 박제시켜고 노력했다. 부르농빌, 바가노바, 발란신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유산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같은 모습으남기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언제나 새로운 아폴로가 출연하고 그와 천사들이 변화시켜 나가면서 발레를 자라게 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순도 100%를 유지했던 덴마크 발레도 덴마크 출신의 위대한 발레리노 에릭 브룬을 시작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바가노바 메소드도 그의 제자들이 같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아폴로들에게 발맞추기 위해 조금씩 유연해지고 있다. 여전히 강경한 발란신 메소드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희석되었다고 한 것처럼 발레는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다만 저자는 무대 위의 작품으로서의 발레는 위대한 아폴로들과 천사들이 가고 난 뒤에 깊은 잠에 빠진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비유하고 있다. 세계 주요 발레단들을 옛날 작품들을 복원하는 박물관으로 표현했으며 이 잠자고 있는 예술을 새로운 아폴로와 그의 천사들이 깨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연 예술로서의 발레가 예전만 못해 발레의 상징적 위치가 쇠퇴할 것을 우려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쇠퇴의 반전은 알기는 어렵고, 이 잠자는 예술을 깨울 아폴로는 외부에서 올지도 모른다"고.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책의 결말을 쓴 저자의 문제졔기에 생각이 많아졌다. 고전이 갖는 위엄은 오늘날에도 여전하지만 상상력 부재로 인한 복원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춤을 가두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냉전 시대가 끝난 후 공산주의 문화에 애증을 갖고 있었던 소련의 예술가들이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옛 유물들을 복원하면서 얻은 것은 진실성이었고 예술성을 잃었다는 것을 예시로 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레에 혁신을 몰고 온 아폴로와 천사들은 지나간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언제나 전통과 고전에서 새로운 이상을 찾았고 답답한 규범에서 인습을 타파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발레 마스터들이 그랬고, 발레 뤼스도 그랬다.


춤의 본질은 언제나 변한다. 그것을 전통으로 가두려는 순간 새로운 아폴로들의 창의성과 색다른 해석을 잃게 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고전발레 작품들도 사실은 마리우스 프티파 버전을 다른 안무가들이 수정한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초기에 만들어진 유물을 본 것이 아니라 이후에 개정되어  전통처럼 계승되어 온 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각 발레단에 퍼지면서 수많은 안무가들과 무용수들의 몸을 거쳐 조금씩 변하거나 아예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지켜봐왔다. 춤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다. 생명력이 있기에 계속 변하고 자라는 것이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 순수 예술말고도 즐길 거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요즘 발레가 끝없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새롭게 춤을 출 아폴로와 그 천사들이 중요하다는 것에 나의 생각이 미친다. 발레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도록 해줄 매혹적인 아폴로와 천사들의 출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저자의 말처럼 역설적이게도 과거와 같은 엄격한 당스데꼴에 의한 교육일까.


책 리뷰를 거의 쓸 즈음 발레를 처음 배웠던 날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나름 '보는 발레'를 좋아했기에 발레에 대한 온갖 판타지를 가지고 시작한 발레는 수업 첫날부터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알고보니 아름다움과 우아함으로 포장한 몸을 극한으로까지 사용하는 빡쎈 근력 운동이었고, 밖에서 보였던 여리여리한 이미지와는 달리 무용실에서는 회원들의 억소리와 함께 땀 냄새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땀 흘리며 배우는 신체 활동에 왠지모를 개운함과 에너지가 충전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안했던 내가 "직접 하는 발레"에 푹 빠지게 되었다. 내가 하는 발레에 푹 빠지면서 단 한번도 꿈 꿔본 적도 없는 일들을 경험하고 추억을 쌓으면서 발레는 어느 순간 내게 다가와 내 인생의 절정기에 나의 노력과 한숨, 설레임과 애틋함 등의 다양한 감정들과 이야기들을 품게 해주었다. 나의 노력과 이야기들을 확장해서 그 옛날 발레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공간을 지나면서 어떠한 수많은 이들이 어떤 노력을 했을까. 그리고 이 재미있는 발레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스토리가 되기 위한 미래에 대한 고찰까지 책 한권을 읽으면서 가슴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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