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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Jul 16. 2024

궁중 예법 vs 리얼리즘 <돈키호테>

마린스키 발레단 vs 로열 발레단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 발레 작품들은 초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아닌 그 이후 다른 안무가들에 의해 수정되어 전통처럼 계승되어 온 버전들을 보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낭만주의 발레의 시작을 알렸던 <라 실피드>는 마리 탈리오니가 파리에서 췄던 버전이 아닌 그 이후 부르농빌이 수정한 버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고 낭만주의 발레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 <지젤> 역시 쥘 페로 버전이 아닌 마리우스 프티파가 개정한 버전을 오늘날에 사용하고 있어요.


고전주의 발레 작품들도 같은 운명이에요. <호두까기 인형>은 프티파 버전이 아니라 각 발레단마다 여러 안무가들이 수정 또는 창작한 버전을 사용하고 있어요. 마린스키 발레단은 바실리 바이노넨이 수정한 버전을 사용하고 있고 조지 발란신은 아예 신고전주의처럼 창작을 했어요. 로열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역시 애슈턴의 창작으로 새롭게 태어났던 버전이에요. 공통점은 조금씩 편집되거나 안무가의 창의력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어도 모두 고전 발레 테크닉과 규칙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에요.


고전주의 발레작품 <돈키호테>도 원본에서 조금 개정한 것과 안무가의 상상력으로 채운 버전을 비교하기에 좋은 예시가 되어서 담아왔어요.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 알렉산더 고르스키 개정의 <돈키호테>와 카를로스 아코스타가 새롭게 만들었던 <돈키호테>가 좋은 비교가 되겠는데요, 여기서 카를로스 아코스타의 <돈키호테>는 고전 발레의 규칙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게 눈에 포착되어서 저의 관심을 끌었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로열 발레단 유튜브 채널이 작품의 전막 영상을 올리지 않고 하이라이트 부분만 짧게 올렸기 때문에 짧은 영상만 봐서는 그 차이점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이 부분은 글로 설명을 할게요.


고전주의 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는 너무 오래 사셔서(?) 노년에 온갖 수모를 겪었어요. 차이코프스키와 글라주노프와 협업할 수 있도록 하면서 프티파가 안무가로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던 극장 지배인 브세볼로즈스키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프티파는 아름답지 못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어요. 새로 부임한 극장 지배인 텔리야콥스키가 그 주범이었는데, 니콜라이 2세가 임명한 발레 마스터인 프티파를 대놓고 쫓아내지는 못하니 많이 치사하게 굴었습니다. 중요한 공연에서 발레 마스터 프티파의 이름을 빼는가 하면 늙어서 작품들도 기억 못한다고 헛소문을 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텔리야콥스키가 아예 대놓고 모욕을 주었는데요, 프티파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볼쇼이 극장의 발레 마스터인 알렉산더 고르스키를 초청해 프티파 안무의 <돈키호테>의 재안무를 맡겼어요. 그래서 고르스키는 원본에서 뺄건 빼고 수정해서 재안무를 했고, 프티파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안무를 수정한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해했습니다.


고르스키는 서서히 러시아에서 불고 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가미하고 황실 극장의 잔재를 쏙 빼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안무를 수정했어요. 일종의 동화적이면서 초현실적인 느낌들을 주는 부분들을 뺀 것인데, 고르스키의 재안무 작품들은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색채가 뚜렷한 '드람 발레'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고르스키가 재안무한 <돈키호테>는 이후 누레예프, 바리시니코프에 의해 또다시 개정되었어요. 마린스키 발레단은 지금까지 고르스키 버전의 <돈키호테>를 사용하고 있는데, 바리시니코프 버전을 사용하고 있는 ABT의 <돈키호테>와도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르스키가 나름 당시로서는 황실 예법을 빼고 리얼리즘을 첨가해 재안무를 했음에도 로열 발레단의 <돈키호테>에 비하면 훨씬 예의바른 춤입니다. 황실극장에서 황족들과 귀족들을 위해 내용 전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디베르티스망(기분전환)'이 나오고 군무도 역시 칼군무에요. 그리고 말이 서민 발레이지 집시들 촌막이 나오는 부분만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화려하고 궁중예법에 충실했던 유산을 느낄 수가 있어요.

알렉산더 고르스키 버전, 마린스키 발레단 <돈키호테>에서 바질 역으로 출연한 김기민 발레리노


키트리 역을 맡았던 빅토리아 테레쉬키나



로열 발레단도 창립 이래 <돈키호테>를 추었다고 하는데요, 누레예프 버전과 바리시니코프 버전을 번갈아 사용해 공연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버전 모두 영국인들의 취향에 안 맞았다고 하네요. 이렇게나 재미있어서 발레 입문 작품으로도 손꼽히는 <돈키호테>가 영국인들은 별 흥미를 못 느꼈다니 역시 영국인들 취향은 색다른가 봅니다. 하긴 나폴레옹 시대에 유행했던 엠파이어 드레스도 영국에 들어간 순간 자체 버전으로 바뀌었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꽃무늬가 들어간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지도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는데, 영국에서는 꽃무늬로 드레스를 덮어버렸고 모자까지 썼으니 애초부터 개성이 남다른 민족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래서 로열 발레단 시즌에는 <돈키호테>가 거의 올라가지를 않았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쿠바 태생으로 로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던 카를로스 아코스타가 이 작품 내가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예술 감독 케빈 오헤어에게 안무를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평소 아코스타가 춤도 잘 출 뿐만 아니라 안무에도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케빈 오헤어 감독은 그럼 해보라고 믿고 맡겼다고 하네요. 이후 아코스타의 창작 결과물이 나왔고, 무대에 올라 대성공을 거두면서 로열 발레단의 정규 레퍼토리에 들어갔어요. 초연한지 10년이 된 2023/24 시즌에도 이 공연을 했습니다.


아코스타는 자신이 만든 <돈키호테>에서 발레의 규칙을 깼어요. 발레 테크닉은 고전 발레의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로지 음악과 춤, 팬터마임으로 이루어진 무언극이라는 고전 발레의 규칙을 깨고 대사를 넣었습니다. 그래서 아코스타의 <돈키호테>에서는 군무로 출연하는 발레 무용수들이 단체로 대사를 하고 함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무대 배경으로 나오는 세트가 움직이고요. 궁중 예법에 충실한 디베르티스망은 당연히 없구요.(물론 투우사들의 춤, 판당고 등 스페인 느낌이 물씬 나는 춤들은 나옵니다) 무용수들의 의상 스타일과 색상도 마린스키 발레단처럼 조화롭거나 화려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른 버전들에는 안 나오는 수수한 차림을 한 마을 처녀들과 걸인들을 등장시키면서 진짜 현실세계를 조망한 듯한 리얼리즘을 넣었더라구요. 그리고 작품 전반적으로 낭만적인 스페인 감성보다는 자유로운 히스패닉의 감성을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의 창작이면 고전 발레를 기반으로 한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으로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자신이 창작한 <돈키호테>에 직접 바질 역으로 출연했던 카를로스 아코스타
마리아넬라 누네즈와 한때 발레 작품에서 커플로 많이 나왔었어요
로열 발레단의 간판스타였어요. 지금은요. 더 출세하셨어요. 버밍엄 로열 발레단 예술감독이십니다.



영상물들을 담아왔어요.

김기민, 빅토리아 테레쉬키나 주연의 <돈키호테>는 전막 영상이 있더라구요.

https://youtu.be/lGdFwlpv-v4?si=XAgUu8u08RktjQEc



다만 로열 발레단의 <돈키호테>는 하이라이트만 있어요. 그래서 전막이 아니고서는 그 차이를 못 느끼게 되는데요, 볼 수 있는 방법은 "로열오페라하우스"에 가입을 하면 14일 동안은 무료로 볼 수가 있어요. 14일이 지나면 유료회원으로 전환이 되어 매달 영국 화폐 파운드로 결제를 하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짧은 영상만이라도 담아왔어요.

https://youtu.be/5fKxzQ8ARTQ?si=jNRl7Ln4166ZKw4P

https://youtu.be/UJo39pcjhOw?si=mQKYJvRfb0Q-6P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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