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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Mar 12. 2023

[독립 3] 119보다 빨라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독립 3] #. 119보다 빨라     


띵, 14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나는 몸을 재빠르게 왼쪽으로 살짝 돌려 잰걸음으로 열 폭을 걸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열 폭을 걸어서 더 재빠르게 번호 키를 누른다. 너무 빨리 집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에 번호를 잘못 누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익명의 누군가가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향인 1인 가구다.     


긴 자취생활 끝에 당도한 곳, 아파트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 호수를 받고, 입주하기 전에 내가 살 집을 가보았다. 일렬횡대 복도식, 한 층에 6세대가 살고,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3세대, 오른쪽으로 3세대가 사는 구조였다. 나보다 먼저 이곳으로 독립한 비비 구성원들의 집 구조와는 조금 달랐다. 내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오른쪽 첫 집, 그러니까 한쪽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통로와 면해있고, 한쪽은 옆집과 면해있었다. 2010년에 이사하고,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옆집에 사는 세대원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엄마와 딸 관계로 추정하는 두 여자를 간헐적으로 보았다.      


‘마을’은 우리 집에 오면서 남성이 옆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목격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남자였나. 그 남자가 그 집으로 들어갔나. 대체로 우리 쪽 라인 3세대는 들고 남이 적은 편이었다. 나는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집에서 나올 때도 밖에 인기척이 있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나온다. 본의 아니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가벼운 묵례를 할 뿐, 안면을 트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가장 적합한 호수 위치다.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야 편하다는,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어디 사는지 파악해 둔다는 친구도 있고, 호기심에 몇 층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다만 ‘아파트 주민모임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비혼여성 1인 가구 스물세 명의 동 호수를 휴대폰 메모장에 잘 적어놓았다.     


베란다로 보이는 앞 동 구조도 우리 동과 같다. 어디선가 폭행이 벌어지고, 뭔가 부서지고 있을 법한 소리가 들린다. 앞 동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현장이라 할 만한 장면이 목격된다.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카톡을 날린다. 지금 이 소리 들려요? 앞 동에서 엄청나게 싸우는 것 같아요. 그쪽은 안 들려요? 우리 동은 잘 안 들려. 내가 내려가 볼까? 지금 누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어요. 누군지 와서 좀 봐줘요. 현관 앞에 누가 계속 서 있어요. 인터폰으로 봐도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주말 오후, 밥상을 물려놓고 TV를 보고 있었다. 30분만 더 보다가 ‘주얼’과 천변 산책하러 나갈 참이었다. 띵동! 벨이 울린다. 누구지? 인터폰을 들고 화면을 보는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유니폼을 입은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를 쓰고 모자도 눌러썼다. 잘 안 보인다.      


누구세요? 

나! (나가 누구지?) 

나는 다시 묻는다. 

누구세요? 

나! (그러니까 나가 누구란 말인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누가 들을까 싶어 누구? 언니? 그려! (그래도 뭔가 미심쩍다.) 현관문 앞에서 다시 묻는다. 언니예요? 이름까지 불러가며 ‘나’를 확인한다. 그려! 약간 격앙된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왜, 휴대폰을 안 봐? 네가 한 시간 동안 카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주얼’이 나보고 가보라고 했어. 산책을 취소하려던 주얼은 내가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한 상황이었다. 내 휴대폰은 거실에서 혼자 무음 상태로 뒹굴고 있었다.    

 

다음날, 봄봄님! 오늘 천변 걸어요? 어, 우리는 7시에 걷기로 했어. 건너 동 사는 ‘주민’이 물어온다. 오다가다 만나는 주민들에게 주얼과 내가 천변을 걷는다는 일정을 익히 알렸다. 나가는 길, 방금 만든 김치전 반죽을 담는다. 어제 우리집에 출동한 ‘마을’에게 카톡을 보낸다. 언니 우편함에 김치전 반죽 넣었음. 주말엔 부침개죠. 우리는 천변 나감. 땡큐. 즐천변.     


오늘은 셋이서 걷는다. 가끔 걷기에 동참하는 주민들이 있다. 배는 좀 나아졌나? 안부를 묻는다. 며칠 전, 갑자기 심각한 복통이 일어나서 마을과 주얼이 그날 밤 그 주민의 차를 끌고 응급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119보다 빨리 출동한다. 그 정도면 안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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