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공동체 2] #. 개인이냐, 공동체냐
나는 사다리 게임으로 모임 회장이 되었다. 아무도 모른다.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회장이 된 순간만 있었다. 첫 모임 날, 사다리 게임을 하자고 모두가 동의했다. 만장일치 시작점은 거기인가. 설마, 내가 당첨될 줄은 몰랐다. 다음에는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자는 위로와 격려 담긴 덕담을 나눴다.
나는 내향형, MBTI에서 ‘I’ 점수가 가장 높다. 내가 회장이 되었다는 것을 어디에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안심했다. 나는 내부적으로 회장 노릇을 찾았다. 정기모임, 생일파티, 여행 일정을 점검했다. 회비를 걷고 공금에서 해외여행 명목으로 적금을 부었다. 학습 도서가 정해지면 책 읽기를 독려했다. 더는 사다리를 타자는 구성원은 없었다. 비비에 대표 직위는 필요 없었다. 역할이 있었다. 우리가 스스로 모임에 공동체성을 부여하고, ‘비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을’은 외부적으로 발언을 맡았다. 나는 인터뷰 참여 후 못다 한 말 ‘인터뷰 투덜기’를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그, ‘느슨한’ 공동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느슨했다면 비비가 그냥 하나의 집단에 머물렀겠지요. 집단이 공동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성을 바탕으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잖아요. 저에게 비비가 중요했고, 그만큼 비비를 중심으로 일상을 꾸려갔습니다. 구성원들에게 이 모임이 계속 밀리는 선택지였다면 유기체가 되기는 어려웠겠지요. 선물처럼 주어지는 관계는 없으니까요. 입장만 하면 되는 공동체는 없으니까요.
비비는 구성원의 주거 독립을 통해 ‘1인가구 네트워크’ 생활공동체 형태를 갖추었어요. 외부에서 봤을 때 비비를 ‘느슨한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은 점은 기존 ‘공동체’에 부여된 무거운 함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와닿는 지점 때문 아닐까요? 심리적 거리를 가볍게 만드는 물리적 거리 같은 거요. 그런데요,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도 싫고, 함께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싫다면 어쩌죠? 견딜 수 없다면,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자신에게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맞는 삶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도 좋겠습니다. 공동체가 누구에게나 공동선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비의 규칙은 두 가지, 월 회비 납부와 월 정기모임 참여. 나머지는 구성원 태도가 전부. 내가 타인에게 매력적이고 좋은 사람이어야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거는 당연지사. 공동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시스템이 공동체를 유지하지 않는다. 형식은 느슨하게, 내용은 쫀쫀하게. 그러나 관계가 형성되고 ‘우리’가 되는 순간, 공동체는 갈등과 동상이몽의 지뢰밭이다.
나는 바다보다 산을 좋아한다. 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무 위에 하늘이 있고, 풀 아래 흙이 있고, 나는 그 가운데 서 있을 때, 경계에 있으면서 안정감을 얻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놀이했다. 나는 키가 작고,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물 밖으로 올라오는 나의 머리를 연거푸 눌러댔다. 호흡곤란이 왔다. 지금도 물을 먹다가 숨 쉬는 박자를 놓쳐 사레가 들린다. 이후 나의 발은 언제나 물 아래가 아닌 땅 위에 있기를 원했다. 익숙한 정서들 속에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잊지 못할 여행 중에 겨울 한라산 종주가 있다. 한 발짝도 더는 뗄 수 없는 몸뚱어리를 설산에 내버리고 정신만 추슬러 내려오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눈이 만든 세계. 9시간 등산은 생에 다시없을 극기 훈련임과 동시에 생에 다시 보지 못할 장관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비비는 3박 4일 제주 여행을 기획했다. 하루는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모두가 원하는 일정은 아니었다. 우리는 온라인 카페에서 소외가 되지 않도록 세부 계획을 세웠다.
‘등산팀을 제외한 이들에게 제주 여행 정보를 준비했어요.’
‘앗! 그냥 숙소에 있을게요.’
‘이런, 같이 올라가게.’
‘그럼, 나도 같이 안 올라가도 되는 거죠?’
드디어 우리는 완도에서 배를 탔다. 뱃멀미하는 ‘반짝별’ 곁에서 나는 물에 빠지면 어떡하나, 불안을 잠재우고 있었다. 절물휴양림에 짐을 풀었다. 제주도까지 갔는데, 진짜 한라산을 오르지 않는 거야? ‘반짝별’과 ‘주얼’은 숙소에서 TV를 벗 삼아 귤을 까먹으며 등산팀을 기다렸다. 누구도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 노고단 해맞이 때도 둘은 정상을 앞에 두고 산장에서 멈췄구나. 그랬구나.
필리핀 세부 여행을 갔다. 리조트 앞 바다는 부안 격포를 방불케 했다. 멋진 바다를 보려면 옵션을 해야 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가이드를 난처하게 했다. 주변 정원 그늘에서 요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했다. 가져간 수영복을 그대로 가져오기 안타까워 리조트 수영장에서 물놀이했다. 나는 반바지를 입고 바닥이 보이는 수영장 난간에서 겨우 발에 물을 묻혔다. 들어와, 깊지 않아, 소리쳤지만 나는 밖에서 물놀이 사진을 찍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절당하지 않는 NO, 무시되지 않는 의견, 존중받는 개인, 나는 비비에서 ‘NO’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공동체를 경험함으로써 나의 개인성과 구성원의 특이성을 알아간다. 개인으로만 존재했다면 몰랐을 고유성은 공동체 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잠깐, 나는 그것을 따를 수 없어요.’라고 구성원이 말할 때, 공동체가 어떤 결정을 의논하고 어떤 규범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개인은 공동체의 신뢰를 가늠한다. 매 순간 다 같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면서, 상황마다 다 다른 퍼센트로 동의가 필요했다. 개인과 공동체는 주체와 객체 위치를 바꿔가며 상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비비는 송년의 밤을 맞이했다. 토론해야 할 안건이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외롭다며 문호를 개방하라는 아파트 주민 말에 비혼 친구들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문자를 돌렸다. 외롭다던 그 주민만 왔다. 식사가 끝난 후 초대 손님이 와 있는 자리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안건은 지역대학에서 비혼여성공동체 ‘비비’를 논문 주제로 삼고 싶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밤은 깊어져 가고, 새해는 밝아오고, 의견은 계속되었다.
100% YES인 사람, 100% NO인 사람, NO에 가까운 물음표인 사람, 딱 반반인 사람, 조건부를 단 세모인 사람, 대의에 따르겠다는 세모인 사람. 확실한 결정을 내린다기보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구성원들의 심경을 나눴다. 안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웃었다. 결정은 내일 새해 첫날 떡국을 먹고 나서 하자는 말에 초대 손님은 이 모임 참 독특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우리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점을 찾아가는 회로를 만들어갔다. 49%로 동의하더라도 그만큼의 책임을 갖는.
나는 다시 인터뷰이가 되었다.
인터뷰할 때마다 돌아와 이불킥했던 나는 인터뷰어에게 물었다.
저도 녹음해도 될까요?
그, ‘공동체’ 있잖아요. 다들 공동체, 공동체 하잖아요. 그런데요, 공동체 쉽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