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가 나를 보는 방식 (자기 인식) (3)
100%는 없다.
내가 정확하게 100% 아는 것은 없다. 하지만 99.9%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잠깐이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그건 바로 ‘나’다. 여러 철학서들이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며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결론은 늘 같다. 인간은 모르겠다. 특히 대중은 정말 알 수 없다. 주식 차트나 원자재 시세보다 더 알 수 없다. 그래서 폭망이 폭망인지도 모르고, 떡상이 떡상인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서야 이럴 줄 알았다며 뒷 북 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무엇을 하기 싫은지, 무엇을 회피하는지, 과거는 어땠고 지금은 어떻고 미래는 어떨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나의 실존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건지,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건지. 0.1%의 내가 99.9%를 잡아먹는 순간이 온다. 내가 그런 건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건지... 본능인 건지... 학습된 것인지...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던가? 몰랐던 0.1%의 모습이 어느 날 툭 튀어나와 내 안의 지분을 확보하면 과거의 인연들은 사람이 변했다고 말한다. 어릴 땐 그런 주변의 평가를 의식했지만, 지금은 '감히 누가 날 평가해?'라며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꼰대가 된 듯하다. 아니지 이미 99.9%의 세계로 넘어왔으니 '꼰대가 됐다.'가 더 맞다.
젊은이들(이런 표현도 자연스러워졌다)의 '영포티'라는 멸칭도 지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가소롭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입 닫고 입꼬리만 올린다. 나는 미래가 보인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이들, 소위 Gen Z들은 α세대에 똑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다. 나는 '영포티'였는데... 뭐 '포켓몬 세대?', '병맛 세대?' 정도 되지 않을까? 이름만 바뀔 뿐 비판하는 모습은 똑같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거다.
거울 속의 나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웃음이 진짜인지, 습관인지, 방어인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변할 수 있을까? 아니 바뀔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제는 더 깊은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정말 내가 아는 그 ‘나’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인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은 불안하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탐구의 출발점이 된다. 의심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내가 믿어온 ‘나’라는 실체가 허상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두렵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나는 다시 연구자의 길을 걷는다. 의심은 나를 흔들지만, 흔들림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세운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묻는다. 나는 나를 의심하면서도, 결국 어떤 나를 믿고 있는가. 나를 정의하는 이름, 낱말, 용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