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려면 일단, 놀아야 한다
최근 들어 막연히 브런치를 다시 열면서
굳이 퇴사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 스쳐 지나간 하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변기에 멍하게 앉아있는데
머릿 속에서 '퇴사 일기'라는 단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응?' '갑자기?' '왜?'라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나는 직감으로 '그래, 이거야'라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평소에도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가 많은데, 또 그렇게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적중할 때가 많기도 했고.
그랬다. 퇴사를 했고, 시간은 덩그러니 생겼고, 글을 쓰고 싶긴 한데
대체 무엇을 써야할지 고민이었던 내게 '퇴사'라는 주사위가 던져진 것.
눈을 떠보니 커다란 주사위가 내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첫 글의 제목을 쓰려는데 그냥 퇴사 일기라고 적자니
뭔가 허전하고 밋밋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 퇴사 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싶어서.
그러다 '퇴'라는 글자 뒤에 '애'를 붙여보았다.
뭔가 퇴사라는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 이건 그러니까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단어다.
사랑을 뜻하는 글자가 되기도 하고, 퇴와 붙으면 침을 거칠게 뱉을 때 나는 소리가 된다.
난 정말 그랬다. 회사를, 팀원을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퇴사를 하는 과정에서는 침을 뱉고 싶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완성된 제목 '퇴애사 일기'.
퇴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난 동안 했던 일은 그러니까
밤새 울다가 한참을 자책했고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매일 밥을 잘 먹고(배달을 주로 했지만)
설거지도 하고(하루에 한 번 정도)
빨래도 하고(한 번에 몰아서)
잘 잤다.(10시간은 자는 듯)
그 와중에 실업급여를 알아보고,
내일배움카드로 뭘 배울 수 있는지도 찾아보고,
은행에 가서 퇴직금 계좌를 개설하고,
동네 수영장에 전화를 걸어 수업을 문의 해보고,
글 쓰는 커뮤니티를 기웃거리기도 해보고,
심리상담도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퇴사여서
경황이 없고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했는데
두서 없이 이것 저것을 알아보던 중
내가 내린 결론은 일단 하나였다.
글을 쓰자.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렇게 울며 불며 속상했던 이유가
내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이었는데(남의 글 고치는 게 내 주요 업무였다)
이번 시간을 기회로 삼아 글을 써야겠다, 는 다짐을 했다.
퇴사 직후, 처음에는 직장생활에 필요한 무언가를 배우면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해보겠다는
거창한 계획도 세워봤지만, 지금은 다 때려치웠다.
글을 쓰자.
1.
내 생각에 글은 쓰는 사람의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쓰는 사람의 시간과 노력과 일생을 녹여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 나의 생각.
2.
그렇기에 글을 잘 쓰려면 빈둥대면서 좀 놀아야 한다.
완전히 백수라기 보다는 반백수 상태가 좋다.
너무 백수가 되면 나태해지니까 적당히 경제활동을 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
꽉 짜여진 틀에 따라 움직이면서 규칙적인 루틴에 따라 쓰는 건
적어도 내 방식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해봤는데 처절하게 실패한 경험이 있다.
3.
일상에서 너무 많은 긴장을 하면 안 된다.
적당히 느슨한 상태로 있어야 생각이 열리고 유연해지는데
나는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사람을 덜 만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고
시간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일단 내년 3월까지는 퇴직금과 실업급여로 어찌어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고
밀고 나갈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보자.
글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