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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타르트 Apr 01. 2024

사별일기12_눈물의 여왕 속 한 장면

말이 좋아 뿌리 깊은 나무이지. 그 누구도 그 환경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불현듯 내가 장례식 속에 서 있을 때가 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한껏 웅크려진 내가 들어오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부모님 사이에 홀로 남겨져 있다. 그렇게 나는 금세 또다시 눈물이 고인다. 이렇게 불쑥 찾아든 그때의 나는 혼자 우두커니 태풍을 견뎌내고 있다.


나는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한다. 사별 후 에도 드라마를 보며 위안을 받고 현실세계에서 도망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예전엔 슬픈 내용의 드라마 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굳이 눈물이 나는 드라마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징글징글하게 눈물 나는 일이 많았기에 유쾌한 드라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더 웃는 나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은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한창이다. 극 중 여주인공의 병명은 뇌종양이다. 남편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와 현실의 뇌종양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굳이 좋지 않았던 내 기억을 뇌내이고 싶지 않았기에 찾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극 중 남주인공과 그 가족에게 받는 위로가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장면들도 많다. (실제론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조차 가족은 힘들기 때문이다.) 


눈물의 여왕 8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바람이 불면 뿌리가 금방 뽑혀버린다. 그런데 태풍 속에서 자란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어 결코 뽑히지 않는다." 

이 대사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끓이지 않으니 

시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니니


말이 좋아 뿌리 깊은 나무이지. 그 누구도 그 환경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극 중에서도 부모는 "나는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이 폭풍 속에 서 있는 걸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다"라고 한탄한다. 아마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이게 내 일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


극 중 남주인공은 뇌종양의 여주인공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하지만 난 남편에게 든든한 보호자는 되지 못했다. 처음 남편의 병명을 마주했을 때 무너져 내린 마음을 오히려 당사자인 남편이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 후 증세가 악화될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무너졌고 매번 남편은 나를 다 잡아 줬다. 그렇게 이겨낼 수 있다고 했던 남편이 떠나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에게도 커다란 태풍이 불어 닥쳤다. 이걸 맞서 견뎌야 하는 것 또한 나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던가. 세상에 그렇게 무책임한 위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상처는 여전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단단하게 하는 무언가는 확실히 생겨나고 있다. 

시간이 지난다고 괜찮아 지진 않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니 생겨나는 그 무언의 단단함.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힘.

내가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


한 번씩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나를 이제는 서서히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겨나고 있다. 감히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조금씩 뿌리내리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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