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행복한 남자, 어나더 라운드
저는 소설과 영화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이들 분야에서 생산자가 될 꿈은 없지만, 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성실한 소비자입니다. 덴마크를 조금씩 공부하면서 문득 덴마크 영화 가운데 어떤 영화가 인상적이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최근 영화 중에는 감독, 배우, 주제가가 모두 인상적이었던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술을 다루는 영화라서 마음에 와닿는 영화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는 영화는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입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검소한 생활 속에 등장한 프랑스 하인 이야기는 먹고사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세 번째 영화는 행복한 사람(Lucky Per)입니다. 덴마크와 행복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미 마음에 두고 있던 영화이었습니다.
세 편의 영화 중 어나더 라운드와 바베트의 만찬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1988년, 2020년에 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편은 완성도 측면에서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은 영화라고 할 수 있네요. 행복한 사람은 191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헨리크 폰토피단 (Henrik Pontoppidan)의 소설을 영화한 작품입니다. 바베트의 만찬 또한 카렌 블릭센 (Karen Blixen)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런데 바베트의 만찬은 소설을 보면 작가가 이자크 디네센 (Isak Dinesen)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 혼동이 될 수 있네요. 실제로 두 분은 같은 사람으로 이자크 디네센이 필명입니다. 귀족 출신인 카렌 블릭센은 자신이 쓴 자서전이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영화가 Out of Africa로, 메릴 스트립이 카렌 블릭센 역할을 했습니다. 블릭센은 노벨 문학상 후보로 2번 추천되었는데, 헤밍웨이와 카뮈가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아쉽게도 후보로만 머물렀습니다.
바베트의 만찬은 그 내용이 간결하고 따뜻합니다. 목사님의 두 따님은 모두 독신으로 목사님 돌아가신 후에도 마을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 자매는 프랑스에서 온 하녀 바베트와 같이 살게 됩니다. 목사님의 두 따님과 바베트는 청교도 생활에 걸맞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베트가 큰돈을 만지게 됩니다. 어떻게 큰돈이 생겼는지는 영화(복권 당첨)와 소설(먼 친척의 유산)이 조금 다릅니다. 아무튼 원래 파리에서 유명한 식당의 요리사 출신이었던 바베트는 그 많은 돈을 하루 저녁 만찬을 준비하면서 모두 씁니다. 사람들은 바베트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그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을 풀게 됩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음식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내가 먹은 음식으로 내 몸을 지탱하고 내 몸으로 내 영혼을 지탱하며 내 영혼으로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생활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바베트는 와인에서 모든 식재료까지 완벽한 한 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해 성대한 만찬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바베트는 “내가 최선을 다할 때 그들에게 완벽한 기쁨을 줄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바베트가 만든 음식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소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바베트는 큰돈이 생겼을 때 사용법을 가르쳐줍니다. 주저함 없이 한 번에 주위 사람을 위해 그 돈을 모두 다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과거처럼 사는 것입니다.
행복한 남자는 아직 한국어로 아직 번역되지 않아 책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한 남자를 택한 것은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분을 만나 요즘 덴마크를 공부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전직 OECD 대사 시절을 떠올리면서 당시의 경험으로 덴마크 대사가 헤프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덴마크 사람이 일상생활을 허투르게 살지 않는 모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바로 행복한 남자라는 영화가 떠 올랐습니다. 행복한 남자에서는 덴마크 사람의 웃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로서 엄청난 재능을 지닌 주인공 페르는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목사인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페르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독교와 가족을 모두 거부합니다. 그는 코펜하겐에 가서 부유한 유태인 집안의 도움을 받아 출세가도에 서게 됩니다. 페르는 유태인 집안의 큰딸과 약혼하고 부유한 장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물 관리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행운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페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부유한 유태인 집안의 최대상속자인 약혼녀인 야코베에게 파혼을 선언합니다. 페르는 야코베에게 “우리는 어디 같은 곳에 속한 적이 있나요? 우리는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결코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더 큰 불행이 오기 전에 여기서 끝내자”라고 합니다. 페르는 자라면서 가족을 포함 어느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채 혼자 지냈습니다. 페르에게 약혼자와의 삶이 그 자체로 큰 행운일지라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반면, 약혼녀 야코베는 페르에게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 간의 관계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나지는 것인지, 그리고 다른 여자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페르의 행운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페르 생각에 자신의 약혼녀는 돈, 교양, 미모를 모두 갖췄습니다. 그렇지만 페르 자신은 그런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자신은 약혼녀와는 너무 다르므로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 관계를 경제학 관점에서 본다면 해석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연애는 초기 조건이 다른 두 사람이 일정한 형태의 거래를 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역 당사자 간 초기 조건이 다르면 다를수록 거래를 통해 양측은 효용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맥주만 있는 남자와 땅콩만 있는 여자는 조건이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만나면 두 분 모두 효용을 크게 향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의 초기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선다는 것은 미래의 효용을 포기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탁월한 지적 능력과 강한 추진력을 지닌 페르와 돈, 교양을 갖춘 야코베는 맥주와 땅콩처럼 상호 보완적입니다. 이들이 결혼을 통해 거래를 튼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페르는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혼자 사는 삶을 택합니다.
3번째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경쾌하지만 슬픈 영화입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기쁨과 슬픔이 겹쳐 있는 삶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사람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5%로 유지하면 사람은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보다 창의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노르웨이 심리학자 Finn Skårderud의 이론을 4명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실험하는 이야기입니다. 실험 초기에는 적당히 술을 마실 때까지는 4명 모두 삶이 즐겁고 뭔가 더 잘 풀리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점차 평균 혈중알코올농도를 높여가는데 그러면서 문제가 하나하나 생기기 시작합니다. 결국 누군가는 죽고, 누구는 더 마시다가 더 힘들어지고, 그렇지만 삶은 이어집니다. 어나더 라운드에는 what a life라는 경쾌한 주제곡이 나옵니다. 젊은 시절 댄서 출신인 주인공 매즈 미켈슨은 주제곡에 맞춰 춤 솜씨를 한껏 보여줍니다. 특히 매즈 미켈슨이 춤추면서 바다를 향해 다이빙하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이야기를 남깁니다. 알코올의 가벼움은 처음에는 사람을 날게 하지만 결국은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만드는 과정부터 사연이 많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감독인 토마스 빈터베르 (Thomas Vinterberg)는 10대 딸 이다 (Ida)와 함께 시나리오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촬영 4일 만에 감독의 딸 이다가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감독은 영화 제작을 중단합니다. 그러다가 감독은 영화를 다시 촬영합니다. 원래 이 영화는 술이라는 주제를 무겁고 어둡게 다루려는 영화이었데 딸의 죽음 이후 감독은 내용을 각색해서 영화의 톤을 많이 밝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덴마크는 청소년 음주에 매우 관대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청소년 음주는 최고봉입니다. 덴마크의 음주 가능 연령은 16세입니다. 다른 나라는 대부분 20세부터인데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어 음주 허용 연령을 18세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덴마크 성인이 반대해서 16세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한잔했던 추억이 평생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인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