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가족들에게 연하장을 쓰려고 커피숍에 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써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막상 쓰려니 어색했다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내 감정을 남에게 숨기고 살아오는 데에만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학창 시절 펜팔을 했었다
다른 지역의 한 여학생과
얼굴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지만
매주 빼놓지 않고 1~2회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 둘 다 고3이었고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시기였지만
게임도 시험직전에 하는 게임이 제일 재밌다는 말이 있듯
고3 야자시간을 이용해 쓰는 편지가 그렇게도 재밌었다
주저리주저리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적어 보내는 별거 아닌 일에
영어 수학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힘이 나는 명언들, 아름다운 시, 감동적인 수필의 문구 등을 편지에 빼곡히 담았다
내 생각과 감정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남짓 심혈을 기울여 매주 1~2통의 편지를 쓰다 보니
당연히 나는 다음 해에 재수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누구보다 생각과 감정을 정확히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뒤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줄 때마다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편지가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는 건 다반사였고
제발 말로 하지 말고 편지를 써서 달라는 친구도 생겨났다
말로 직접 하지 못하는 속 깊은 이야기를 편지로 대신 전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한 때는 그랬던 난데
불과 몇 년 편지를 안 썼다고
연하장 하나 쓰는 게 이렇게 어색할 줄이야
충격적인 일이었다
결국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내년에는 더 좋은 일 많았으면 좋겠습니다"가 내용의 전부인 내 초라한 연하장을 보며 와이프는
"영혼을 좀 담아서 쓰지. 으이구!"라며 독설을 날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마음은 그래도 아직 따뜻한데 그 따뜻함이 글로는 전달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
마음을 고쳐먹고 올해는 다시 글을 써 버릇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 둘 글을 쓰다 보면
올해 말 연하장을 다시 쓸 때 즈음엔 로맨틱하고 닭살 돋는 멘트를 작년보단 더 거리낌 없이 적을 수 있지 않을까
소박하지만 절박한 새해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