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땐 성질이 나빠서 사람들 많이 때리곤 했는데, 이제는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내가 안 때렸어”
할아버지는 면담을 하며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우실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보단 과도한 여성호르몬 탓은 아닐까 의심만 들었다.
만일 저 표정과 말투가 거짓이라면 진짜 연예대상감이다.
설마 연극을 하신 분은 아니겠지란 생각도 들어 사건기록에서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아보기도 했을 정도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이 젖듯
면담이 계속되면서 약간내 마음도 바뀌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귀찮게 하시는데
그냥 속는 셈 치고 할아버지 말이 전부 사실이라 가정하고 한번 기록을 다시 봐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항소이유서 제출기한(20일 이내)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큰맘 먹고증거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혹시 뭐라도 시비걸만 한 껀덕지가 있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그런데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과 법정 진술을 비교해 보니 너무나 똑같이 진술을 잘했다
“저 할배가 택시 뒷자리에서 오른손으로 우산을 들어 내 머리를 쳤어요”
괜히 이 부분에서 힘을 빼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부분은 없을까 고심하던 중
수사 과정에서 검찰 수사관이 할아버지를 부당하게 대했다는 정황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할아버지가 피해자를 폭행하자 피해자도 할아버지를 폭행해 처음에는 쌍방폭행으로 입건된 사건이었는데
경찰의 중재로쌍방 합의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각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택시기사가 할아버지를 폭행한 부분은 경찰단계에서 종결되었다(단순 폭행사건은 합의 의사만 확인되면 바로 종결된다)
할아버지는 사건이 그렇게 쌍방합의로 정리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기록을 다시 보니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이후 택시기사가 합의의사를 번복했다.
즉, 할아버지가 합의를 해 줘 자기의 폭행사건이 종결되자,바로 노선을 바꿔 검찰 수사관에게 자신을 때린 할아버지를 강력히 처벌해 달라고 한 것이다.
택시기사가 굳이 이렇게까지 했던 건 검찰 수사관이 할아버지 몰래 택시기사에게만 연락해서 기존 합의 의사를 번복하라고 종용했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전과도 많은 범죄자가 선처받는 게 배 아팠나 보다. 참 어이가 없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운전자폭행)이었기 때문에
단순 폭행과 달리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사건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피해자와의 합의는 무척 중요한 양형사유인데
이런 식으로 수사기관이 합의의사를 번복하라고 종용한다는 게 내 상식으론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한 수사기관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순간화가 나면서 승부욕이 발동했다.
하지도 않은 일로 유죄선고를 받는 것도 억울한데
수사기관의 편향된 태도 때문에 할아버지는 양형에서조차 상당한 불이익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때부터 이 사건은 꼭 무죄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내가 뒤통수를 쎄게 맞은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기록을 계속 보다 보니
이상한 부분이 하나 발견됐다.
이 사건은 사실 택시 안에 있는 블랙박스만 제출되면 끝나는 사건이다.
비록 택시 내부 영상은 촬영되지 않았겠지만
폭행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피해자의 대응이 조금 이상했다.
이하는 당시 제출했던 항소이유서 내용 일부이다.
“블랙박스 영상 혹은 음성 등과 관련하여, 피해자는 최초 담당 수사관에게 블랙박스 영상을 즉시 제출하겠다고 했다가, 2017. 8. 30. 11:00경 담당 수사관이 피해자에게 블랙박스 영상 제출을 독촉하자 회사에서 블랙박스영상을 확인하였으나 내부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고 진술하였고(증거기록 제27페이지 수사보고(피해자와 통화)참조), 바로 그다음 날인 2017. 8. 31. 17:38경에는 담당 수사관에게 ‘사건을 취소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 처벌불원의 의사표시를 하였습니다(증거기록 제28페이지 수사보고(처벌불원의 의사표시)참조).
이후 피해자는 2017. 9. 27.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다음 날 조합에 가서 확인을 했더니 벌써 삭제가 된 상태라고 하여 확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진술하였고(증거기록 제42페이지 진술조서 참조), 법정에서도 “제가 할지를 모르니까 우리 조합에 가서 확인해서 영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영상이 지워지고 없더라고요. 저것이 순간적으로 자동으로 포맷이 되더라고요”(공판기록 제33페이지 증인신문조서 참조)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술내용과 관련하여, 우선 피해자는 담당 경찰과의 최초 통화 당시 “회사에서 블랙박스영상을 확인하였으나 내부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하여 영상은 있었지만 내부가 안 보인다는 취지로 진술했는데, 이후 검찰 및 법정에서는 ‘영상이 삭제되었다’ 즉 영상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여 그 진술을 번복하였습니다.
또한 피해자는 수사관으로부터 블랙박스 제출을 독촉하는 전화를 받은 바로 다음날인 2017. 8. 31. 수사기관에 처벌불원의사를 밝혔는데, 사건발생 이후 일주일 가량 아무런 입장변화가 없다가 블랙박스 영상 제출을 독촉하는 수사관의 전화를 받은 바로 다음 날 피해자가 갑자기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는 정황을 보면, 블랙박스 영상에 뭔가 불리한 내용이 담겨있어 사건을 그냥 종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도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폭행피해와 관련된 피해자의 수사기관 및 법정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긴 하지만
블랙박스 제출과 관련된 피해자의 언행은 일관되지 않고 선뜻 이해하기도 어렵다.
반면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부터 일관되게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고 그 진술에 특별히 의심스러운 정황도 없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지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구한다는 취지로 항소이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리고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하면서
"피고인에게많은 동종전력이 있기 때문에 재범의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그로 인해 이미 수사기관에서 많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만일 이 법정에서까지도 이런 부당한 대우가 계속된다면 이는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입니다. 부디 편견이 아닌 객관적인 증거에 입각해서만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