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당 한 명이 살고 있는 도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도시. 내가 있을 곳에 대한 고민은 커지지만, 내가 있고 싶은 곳인가에 대한 의문지 존재하는 도시.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만 이곳에 있는 나만은 달라지지 않는 도시.
서울이 아니다. 하지만 서울과 닮아 있는, 수많은 빌딩이 겹쳐져 숲을 이루고 있는 '중경삼림', 홍콩이다.
왕가위 감독이 지금 봐도 감각적인 '스텝프린팅' 촬영기법을 사용한 건 아마도 그런 홍콩을 표현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수많은 건물과 간판, 사람이 빠르게 지나쳐 가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건 그 속에서 동떨어져 시간이 흐르는 듯한 내 모습뿐이다.
경찰 223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홍콩 속에서 마주친 알 수 없는 여자와 정확히 57시간 후 사랑에 빠진다
내 주변의 것들이 빠르게 흘러가면 나는 혼란스럽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을 앞두고 있던 당시 홍콩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 혼란은 지금도(?) 중국 본토와는 다른 분위기의 홍콩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오른다고 했던가. 이는 그야말로 우연 같은 필연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찰나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사람.
경찰 223은 그렇게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저 우연처럼 내가 정해놓은 타이밍에 가게에 들어온 사람과 사랑에 빠지겠다는 가벼운 다짐으로 시작된 사랑이지만, 700만 인구의 도시에서 하필 그 타이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마주친다는 건 필연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마약상과 경찰이란 운명적인 구도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어차피 서로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홍콩에서는 그렇게 사랑이 시작돼도 괜찮다고 말한다. 비록,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사랑이 끝나 버린다 해도 뭐 어떤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을 사랑이다.
짧은 순간에 시작된 사랑이란 게 결과를 만드는 건 아니다. 찰나의 순간에 시작된 사랑이라도, 이 도시가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마음 만은 선명하게 기억되는 사람. 빠르게 흘러가는 빌딩숲 어디선가 흔적이 느껴지는 사람.
언제, 누구부터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뭐가 중요한가
경찰 663은 같은 홍콩에서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다. 너무나 빨리 다가왔기에 생각조차 할 틈도 없이 시작된 사랑이다. 내 일상에 스며들며 시작된 사랑이 아니다. 내 삶에 침투된 사랑이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내 집의 곳곳에 변화를 일으킨 그 사람처럼.
내 의지와 별개로 시작된 것이라고 사랑이 아니겠는가. 홍콩은 내 의지와 계획과 준비를 통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랑은 홍콩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경찰 633의 집 옆에 놓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처럼, 내 몸을 실으면 그저 이끌리는 대로 향하게 되는 사랑과도 같다.
그저 이끄는 대로 정해진 비행기에 몸을 실을 뿐
혼란 속의 홍콩에서 생각은 사치스러운 행동이다. 그저 원하는 대로 나아갈 뿐이다. 나를 떠난 그녀에게 전화를 돌리며 붙잡는 일도, 내 연락을 피하는 그녀의 선택도,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간 그녀도, 그녀의 소식을 기다리는 일도, 그런 그에게 남겨진 편지를 전해주지 않는 일도, 대신 내 마음을 담은 티켓은 전달하는 일도. 무엇이 옳은가, 더 좋은 일인가에 대한 생각 이전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흐르는 사랑이다.
홍콩에서의 사랑은 그래야 한다. 혼란 속에서 확실한 건 내가 느끼는 내 마음뿐이다. 확실한 내 마음만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는 말자. 그 마음이 오늘로 끝날지, 아니면 만년이 될지는 내가 정하기 나름이다. 내가 원하기 나름이다.
서로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시작돼도 나쁘지 않다
왕가위가 그저 가볍게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정말 가볍다. 이렇다 할 사건이랄 게 없다. 대신 감각적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구도, 조명, 대사 모든 게 감각적이다. 그래서 어지러울 수 있다. 그렇기에 깊은 생각이 필요치 않은 영화다. 그저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인 홍콩에 어울리는 영화이자 서울과도 닮은 영화다.
한 때 홍콩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경삼림은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시절의 감각을 잊지 못해 또다시 꺼내 보게 된 옛날 영화다. 그런데 새롭다. 내가 홍콩을 가고 싶다면 이 영화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