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vn Aug 27. 2023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날

엣프피(ESFP)의 나라


리모트잡 알바 하나 부여잡고 포르투갈에 머물던 때였다. 일 년 전 한국에서 영어 스터디 모임으로 만난 한 브라질 친구와 우연찮게 메시지를 했다.


"네가 리우에 살고 있다고 했던가?"

"응, 나중에 한 번 놀러 와!"

"그래? 그럼 다음 달에 갈게!"

"???"


리우. 리우 데 자네이루. 삼바? 오 마침 카니발도 하네?


처음으로 도전해 본 유럽에서의 홀로살이가 꽤나 적성에 맞았던 터라 당시의 나는 겁대가리가 없었다. 들어본 도시 + 재밌는 축제 + 친구 고향 삼 박자에 오케이! 하고 해맑게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이때부터 친구네 가족은 패닉이 되어 머리를 싸매고 나를 살리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한국 친구? 조그마한 애 혼자 여길 온다고? 걔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넌 내가 가만 안 둘 거다."


실제로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정색하며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모든 게 정반대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애가 브라질을 오겠다니. 그들의 눈에 나는 눈 깜짝할 새 모든 게 털려버릴 수 있었던 순진무구한 외국인 여자애였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이미 대환장 파티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미션 1: 마피아 기지에서 살아남기


"숙소는 알아봤어?"

"응! 여기."

"엇 여긴 안돼! 전부 마피아 기지 근처야."

"???"


마피아요? 영화에서 보던 그 마피아? 에어비앤비에 올라온 번듯한 숙소들 상당수가 파벨라(favela)라 불리는 마피아 소굴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번화한 관광지 옆이라도 멋모르고 이런 골목에 들어갔다간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자동차고 가진 모든 걸 빼앗길 수 있다(어쩌면 목숨까지도). 친구가 없었더라면 두목님과 보란 듯 이웃사촌이 될 뻔했다.


일 년 만에 만나 반가움 반, 어색함 반으로 마주한 친구는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와 숙소까지 택시로 바래다준 뒤, 다시 한 시간 뒤 떨어진 집을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숙소 앞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고 이동했고, 다시 택시를 타고 숙소 앞까지 바래다준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내겐 너무 황송한 호위였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1. 로컬과 함께 다니는 게 안전하고, 2. 버스나 지하철보다 택시가 안전한 대중교통(?)이라는 이유였다.


실제로 리우 시민들은 버스나 지하철보다 택시를 애용하는 경우가 많다. 소매치기가 워낙 많아 잠깐 방심하면 바로 털리기 때문. 버스 창문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밖에서 버스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소매치기가 바로 낚아채간다. 심지어 택시를 타더라도 기사 아저씨가 모르고 파벨라를 가로질러 가면 총 든 마피아들에게 붙들려 다 털릴 수도 있다.


밖이 위험하다 보니 놀 때도 집에서 자주 만나는데, 미국의 홈파티와는 약간 재질이 다르다. 브라질 사람들에겐 가족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원주민들의 습성이 남아있어 가족 단위 행사나 파티가 정말 많다. 카니발 같은 휴가철엔 가족들 다 같이 교외의 별장으로 MT처럼 휴양도 간다. 거기에 생판 남인 자식 친구(= 나)도 그냥 초대해 데리고 간다. 놀고 있다 보면 이웃들이 또 하나 둘 모여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수영하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친구가 된다.


어찌 보면 '욜로(YOLO)'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진짜 언제 총 맞아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화끈하게 놀고, 현재를 최고치로 즐긴다. 어느 나라를 가든 파티에서 제일 미친 듯이 놀고 있는 애들에게 어디서 왔냐 물어보면 다 브라질 애들이다. 돈을 얼마를 벌든, 무슨 직업을 가졌든, 얘가 내 옆집 애든 앞집 애든 친구의 사촌의 사돈의 친구든, 그런 건 이들에게 하등 중요치 않다. 행복한 오늘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뒷전으로 미루는, 앞만 보고 달리는 한국인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리우에서의 일과: 카이피리냐(Caipirinha, 브라질 국민 칵테일) 마시면서 물놀이 하기, 친구네 집 마당에서 고기 구워먹기, 보트 빌려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생일파티하기



미션 2. 남사친과 함께 비키니 쇼핑


"아 맞아, 너 비키니 있어?"

"ㅂㅣㅋ...? 아니 없는데.."

"아 그래? 그럼 바다도 갈 텐데 비키니 사러 가자!"

"???"


유교걸을 때려치우겠다고 해외로 도망친 나에게도 브라질에서의 일상은 어나더레벨이었다. 한반도 핏줄이 내려온 자에게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흥선대원군 모먼트를 브라질 핏줄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은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그러니까 입 밖으로 내뱉기도 쭈뼛거려지는 이 의복은 이들에게 그냥 수영용 티셔츠 같은 것이었고. 해변 도시인 리우에서야 그렇게 비키니, 트렁크 차림으로 백주대낮에 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브라질리언 팬티'라 알려진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이라 하면 엉덩이가 전부 드러나는 티팬티들. 태닝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옷이 걸쳐진 부위란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고, 트월킹의 나라답게 신체부위 중에서도 엉덩이에 유독 미쳐있어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옷은 더 좋아했다.


바디프로필 찍을 정도로 몸매가 좋아야지 이런 옷들을 입는 것도 아니다. 깡마른 체형부터 플러스 사이즈까지 모든 종류의 바디를 이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떤 몸매든, 무슨 옷을 입었든 그러려니 하지 나노 단위로 평가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비키니를 사 와서 무엇을 했냐. 친구 부모님과 바비큐 파티하고 해수욕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리우에는 예쁜 바닷가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스케일이 압도적.


우리나라에서 성적으로 문란하다, 부끄럽다 여겨지는 것들은 리우 사람들 입장에선 그저 전체이용가다. 애당초 섹슈얼함을 인식하는 역치 자체가 굉장히 높고(= 노출은 자연스러운 것, 그냥 신체 부위), 남녀 할 것 없이 성적으로 워낙 개방되어 있다 보니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길 일도 없다. 성적인 본능을 숨기지 않는 야성미 넘치는 동물의 왕국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연애도 공식 연인 관계(?)로 서로 인정하지 않는 한, 여러 사람과 캐주얼하게 한다. 공식 커플이나 부부가 되어도 바람을 피워 여러 부인이나 남편을 두게 된 경우도 꽤 흔하다. 브라질 연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해 주는 공공재(마지막 수식어는 일대일 관계에 익숙한 우리의 가슴에 대못 박는다)’다. 분명 이렇게까지 나를 아껴주고 애정 표현을 해주는 인간이 없는데, 보면 다른 연놈들한테도 그러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나라별 엠비티아이(MBTI)가 존재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브라질과 한국을 비교해 보면 엣프피(ESFP) - 인티제(INTJ)의 관계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반대의 인상을 준다. 브라질 사람들이 아무리 내향적이어도 외향적인 한국인 텐션을 씹어먹을 정도로 이들의 파티 유전자는 어마무시하다.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현재를 최대치로 즐기고 정열적이다. 마음속 상처나 한을 쌓아두지 않고 감정 표현도 솔직하게 한다. 남자도 울고 싶을 땐 목놓아 울고, 여자도 남자가 마음에 들면 돌진한다.


대체로 이들이 가진 성향의 스펙트럼이 우리의 그것과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이 내가 두 달 여를 리우에 살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저 물리적으로 구 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곳인 줄로만 알았는데. 직접 살아보니 옷차림, 사고방식, 생활, 성격, 가치관 등 사실상 이 사람들의 모든 면모가 내가 알던 법칙과는 정반대였다. 개인은 상상 이상으로 나고 자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 컬처 쇼크의 연속이었던 지구 반대편에서의 나날들이 어땠냐고?


짜릿했다.


타인의 시선을 쥐뿔도 신경 쓰지 않고 춤추는 짜릿함,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대신 배 째라 드러누워 버리는 짜릿함,

내 감정을 눌러 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짜릿함,

언어가 안 통해도 위아더월드로 함께 어깨동무하고 노는 짜릿함,

남과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짜릿함,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순간순간들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지 어쩌겠어, 하고 툭 놓아버리고 나니, 그제야 인지할 수 있었다. 완벽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라며 내 안에서 나를 옥죄고 있던 무언의 규율과 구속들이 있었다는 걸.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해서 불행했던 게 아니라, 현재의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아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가끔씩 이런 정반대의 세계에 나를 놓아버리는 일은 정신건강에 꽤나 좋다. 내가 잊고 지냈던, 어쩌면 내가 학대하고 방치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반대편의 나를 찾아 안아줄 수 있으니까.



P.S. 끝으로 옆에서 알뜰살뜰 챙겨준 따뜻한 친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이 친구들 덕분에 죽지 않고(?) 두 달 간 내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마드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