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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Nov 27. 2023

발리보다 더한 파라다이스

일주일 간의 천국 여행기

문자 그대로, 파라다이스를 경험하고 왔다.

물도, 전기도, 인터넷도 없는 외딴섬,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여행을 거듭하며 언젠가부터인가 나는 줄곧 자연에 붙어있기 시작했다. 도시의 활기, 대단한 사업과 투자 이야기, 그 속에서의 내 하루하루는 정글 속에, 해변가에 드러누워 있을 때면 찰나의 우주먼지로 변했다. 오늘이 며칠, 무슨 요일이더라? 내가 고군분투하던 물질세계의 온갖 잡음과 번뇌를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그곳에서의 시간이 그 어떤 심리 테라피보다도 나를 평화롭게 했다.


그렇게 만난 지상낙원, 팔라완


계기는 친구가 추천해 준 '타오 익스피디션(Tao Expedition)'이라는 투어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십여 명의 여행자들과 필리핀의 군도 팔라완 북부를 탐험하는 4박 5일의 여정. 한국인 관광객들에겐 비교적 덜 알려진 휴양지 엘니도(El Nido)와 다이빙 스팟으로 알려진 코론(Coron) 섬, 그리고 그 사이 사람들의 손때가 묻지 않은 무인도와 바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십여 년 전 이곳 섬에 살던 로컬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이 작은 투어는 입소문만으로 13개의 베이스캠프, 250명이 넘는 스태프를 둔 공동체로 성장했다. 섬에서 나고 자란 로컬들이 타오의 일원이 되어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고향을 보여주고, 이를 통한 수익은 다시 외딴섬들에 학교와 농장을 짓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쓰인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천국에서의 나날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행복했다. 어떤 단어로도 그곳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잔상을 오랫동안 잊지 않도록 그곳에서의 경험을 몇 자 남겨보려 한다.



보트를 타고 베이스캠프로



타오 일정은 엘니도에서 코론 행, 코론에서 엘니도 행 이렇게 두 갈래의 코스가 있다. 나는 코론에 도착해 며칠간 다이빙을 좀 더 해보려 전자를 택했다. 보트를 타고 짧으면 30여분, 길면 서너 시간 정도 떨어진 섬들을 호핑하게 되는데, 그 사이 사이에는 스노클링, 카약킹을 하거나 직접 잡아 올린 물고기로 식사를 한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 근처나 바다 한가운데의 형형색색 산호 정원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으면 열대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실감하게 된다.



한바탕 물놀이를 하고 올라오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거나 햇볕에, 그늘 아래 드러누워 낮잠을 취했다. 재밌었던 건 보트와 섬의 베이스캠프에는 최소 한 마리의 개가 수호동물(?)처럼 지내고 있다는 점. 사람들을 따르고 물에서 뛰노는 모습이 말도 안 되게 귀여운 친구들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의 한량 체험



그렇게 보트를 타고 도착해 처음 마주한 베이스캠프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무로 지어 올린 오두막과 전망대, 곳곳의 휴식 공간과 비치발리볼 코트까지. 천국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이 편리하고 완벽해서가 아니다. 와이파이는커녕 전기조차 한정된 곳도 더러 있었고, 어떨 땐 씻을 물도 모자라 수풀 속 엉성히 지어진 오픈 샤워시설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샤워를 하기도 했다. 이틀째 쯤인가 나의 생존 여부를 며칠간 못 알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가족들에게 메시지만 남기고 휴대폰도 멀리 던져놓았다.


그렇게 속세와의 모든 연결이 차단된 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우리 그룹은 스무 명 중 절반 이상이 커플에 솔로 트래블러로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딱 넷 뿐이었다. 그 대부분도 대부분 유럽에서 휴가를 내 찾아온 사람들, 아시아 사람은 나와 다른 필리핀 여자애 둘 뿐이었다. 혼자 일주일 가까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는 금세 가족이 되었다.


내게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첫날 함께 친 당구(?)가 계기가 되었다. 목조 당구대에 당구공 대신 평평한 칩들을 가지고 우리는 스태프들과 팀을 이뤄 2대 2, 3대 3으로 자기 직전까지 플레이를 했다. 실력은 영 엉망이었지만,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팔짝팔짝 뛰는 나의 리액션이 웃겼는지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모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게임은 그 뒤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낮에는 밖에 놓인 코트에서 비치발리볼이나 농구를 했고, 밤에는 카드 게임을 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손을 안경 모양으로 얼굴에 갖다 댄 채 이상한 닭소리를 내는 '치킨 고글' 같은 손게임들을 했다. 마치 스마트폰이 없던 어린 시절 동심 속 세계에 빠진 것처럼.


다 큰 어른들끼리 초등학생들이 놀이터에 둘러앉아할 법한 게임들을 하며 바보처럼 깔깔대는 순간들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스태프들은 섬사람들답게 바다에 나가 1미터가 넘는 물고기들을 잡아오는가 하면, 건물 3층 높이는 될 법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코코넛을 따기도 했다. 조개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물속에서 도넛 모양의 버블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줬다. 자연과 가까이 자란,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인간의 원형은 이렇게 건강하고 생기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섬에서 잡은 고기와 채소로 오픈 키친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하나둘씩 모여 함께 요리를 돕기도 했다.


5시 즈음이면 다 같이 전망대로 향했고, 기타 반주에 함께 노래를 부르며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주한 셋째 날 해 질 녘의 광경을 볼 때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우는 순간이 손에 꼽을 정도로 T인 인간이 그냥 사람들과 둘러앉아 풍경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감동을 받을 수가 있다니. 사람이 이렇게 소소한 순간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베이스캠프가 있는 섬들엔 타오 사람들과 몇몇 로컬들만이 사는 작은 빌리지뿐이다. 주변에 도시 불빛이 없다 보니 밤에는 늘 은하수를 맨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별이 쏟아졌고, 이따금씩 별똥별도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실컷 놀다 칠흑같이 까만 밤에 바다에 들어가면 플랑크톤들의 푸른 불빛이 우리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감쌌다. 그 빛에 신난 우리들은 물속에 뛰어들어 쉴 새 없이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웃고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대단할 것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곳에서의 일상은 별다른 미사여구를 갖다 붙일 필요도 없이 단조로웠고,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심심할 때 물놀이를 하고, 그러다 졸리면 해먹에 누워 자고,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유치한 게임을 하고.


그럼에도 몇 주가 흐른 지금까지도 그곳에서의 시간이 내게 기나긴 여운을 주는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원초의 자연과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타오뿐 아니라 타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아기자기한 엘니도 타운과 그 이후 코론에서 다이빙을 하며 탐험한 바닷속까지. 팔라완은 내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간으로 돌아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일상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때 또렷이 깨달았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에는 그리 대단한 것들이 필요치 않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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