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씨엠립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 하는 질문은
여행을 시작하며 떠오른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가 유독 그랬다.
지지난주 베트남 푸꾸옥 섬에서 회사 리트릿을 마친 후, 친구들과 태국 페스티벌을 가기 전까지 딱 일주일이 비어있었다. 집을 왔다 갔다 하긴 애매한 일자에 지도를 보며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나라가 캄보디아였다. 베트남과 태국 사이 샌드위치로 껴있는 게, 딱 여기서 일주일을 보내면 여행 루트가 아주 아름답겠네 싶었다. 효율충의 브루마블 행선지는 대개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그렇게 프놈펜에 도착한 후 첫 이틀은 이전 일정의 여파로 16시간을 자는 바람에 시원하게 날렸다. 뭐 그래도 어차피 캄보디아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건 씨엠립에 있었다. 바로 홈스테이. 일전에 정혜윤 님의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을 읽은 후, 캄보디아 로컬 빌리지에서 계획 없이 묵어보는 게 일종의 버킷리스트가 됐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족의 가슴을 뛰게 하는, 현지 주민이 되어 만나는 하루하루가 내겐 제일 기대되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야간버스를 타고 씨엠립에 도착한 뒤, 나는 두 군데의 로컬 홈스테이에서 나흘을 묵었다. 캄퐁 클랑(Kampong Khleang)의 플로팅 빌리지, 그리고 반대편 방향으로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리얼 홈스테이(Real Homestay).
씨엠립에는 세 개의 플로팅 빌리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캄퐁 클랑은 시내에서 한 시간 반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로컬 중의 로컬 지역이다. 나무와 철판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이 강어귀부터 빼곡히 열을 맞춰 들어차 있는 모습이 진짜 물 위에 떠있는 마을 같았다.
강 건너 보트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는 마침 플로팅 빌리지를 오랜 시간 연구한 캄보디아 출신 연구원이 함께 묵고 있었다. 그 친구와 얘기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은 플로팅 빌리지가 캄보디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하루 일당은 대략 50센트, 한 달이면 2만 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대부분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고,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잡은 물고기를 하루종일 손질하며 하루 500원도 못 되는 수당을 챙겨간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어획량이 절반 이상 줄어 그 마저도 못 잡는단다.
빗물로 강이 차오르는 우기가 되면 다리는 물론이고 집 일부까지 물이 들어찬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뛰어놀던 공터가 완전히 물에 잠겨 이때는 정말 보트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학교 - 아니 학교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교실 하나 크기의 집 - 도 강 한가운데 있어 아이들은 보트를 타고 통학을 하는 듯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컸다. 내가 묵었던 홈스테이의 호스트와 앙코르와트를 동행한 가이드는 모두 기러기 아빠였다. 수입이 끊기자 돈을 벌기 위해 시내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호스트 가족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키우는 개, 고양이와 산책을 하다가 야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팬데믹 전 일주일 내내 예약이 꽉 차 있던 앙코르와트 가이드 Mr.T (실제 그분이 쓰는 닉네임이다) 역시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긴 뒤 플로팅 빌리지로 갔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페트병들을 모아다 엮어 플라스틱 배(?)를 만들고 거기에서 먹고 자며 일 년을 버텼단다. 아직 팬데믹 이전만큼 회복되지 못해서 여전히 일주일에 이틀밖에 예약이 없지만, 그래도 다시 가이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며 꼭 리뷰를 남겨달라 신신당부했다.
여행객의 시선으로 기대했던, 사람 냄새나는 진성 로컬들의 현실은 마주하고 보니 알알했다. 발리는 이젠 관광객이 너무 많이 와서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아직 2020년의 출혈이 멎지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자기엔 이들은 너무 밝았고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다.
홈스테이의 아이들은 늘 먼저 다가와 내게 필요한 것이 없느냐 물었고, 회화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여행객들이 올 때마다 말을 걸며 더듬더듬 배웠다는데도 12년을 책상 앞에 꼬라 박혀있던 학생 때의 나보다 영어를 더 잘했다. 학교에서 호텔경영을 공부한 첫째 아이는 이스탄불에 있는 인턴십에 붙었다며, 곧 해외살이를 할 생각에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영어로 일절 소통이 안 되는 다른 주민들도 프렌들리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동네 하나뿐인 외국인인 나를 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짓고 강 건너편에서부터 연신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도 쭈뼛거리며 다가와 인사를 했다. 크메르 스타일로 끼니도 매번 챙겨주고, 로컬 마켓 구경도 시켜주고, 내가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손짓, 발짓, 통역기를 섞어가며 물심양면 도와줬다.
이들의 삶의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하루하루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까?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항아리 물을 퍼 샤워를 하고 볼일을 보는 게 안 답답할까?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반갑게 인사를 할까? 왜 이방인인 내 입 하나 덜 생각을 않고 이걸 나눠먹고 앉아있을까?
내가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동정, 연민 이상의 복잡 미묘한 온기였다. 이런 곳에도 사람은 살고,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행복하고, 이런 곳에서도 나누며 사는데, 나는...? 나는?
나는 뭘 더 가져야, 뭘 더 이뤄야, 뭘 더 해봐야 자족할까? 뭐가 더 필요할까?
처음 리모트 잡을 시작해 한국, 유럽, 미국에서 노마드 생활을 할 때의 목표는 그랬다. 어떻게 더 적은 시간 동안 더 많은 돈을 벌까. 어떻게 억 소리 나는 연봉이 될까.
그렇게 돈, 돈, 돈 야망 넘치던 나의 비전은 이런 사람들을 마주할 즈음부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제대로 된 음식, 옷, 집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 그럼에도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은 내가 한국, 도시에서 만난 웬만한 부유한 사람들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다 가졌지만 불행한 사람들. 행복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눈앞에 처연히 드러나는 이 괴리가 나를 혼란하게 했다. 그리고 그 때문인가, 내 인생에 대고 참 식상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행복이 뭐지?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지?
아직 정답은 모르겠다. 어쩌면 정답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부라는 잣대를 들이밀고 거기서 행복의 기준을 찾으려 했던, 거기서부터 난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마냥 돈을, 효율을 좇아 앞으로만 나아갈 줄 알았던 나의 여행은 이 질문을 맞이한 순간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