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생활비 통장에 마이너스가 찍힌 뒤 느낀 점
올해 1-2월, 돈을 벌기 시작한 이래 내게 큰 경종을 울린 순간들이 몇 있었다. 몇 가지 큰 지출이 있었는데,
1. 동생이 발리에 와서 나와 함께 한 달을 살았고,
2. 그 뒤 엄마도 방문해 함께 발리 주변 섬들을 여행했으며,
3. 그러는 와중에 3월 유럽에서 열릴 회사 리트릿에 참여하기 위해 유럽행 티켓과 그곳에서 지낼 숙소들을 예약해야 했다.
일찍이 예정되어 있던 일정들이었지만, 나는 커질 지출을 대비해 두세 수 앞서 버짓을 마련할 생각은 못했던 빡대가리였다. 결국 모아두었던 현금은 2.의 중간 시점쯤에서 모두 털리고 말았고, 월급날까지 말 그대로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필 가족여행을 나온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집히는 대로 옷을 샀던 순간, 끌리는 대로 아무 데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순간, 쓰지도 않는 쓰잘머리 없는 사치품들을 물욕에 질렀던 과거 순간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직장인 3년 차 - 사회의 쓴맛, 차가운 맛을 덜 본 우유부단한 내가 가지가지 모습으로 통장 내역에 찍혀있었다. 오우, 후드려 패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느 나이대건 다 그만한 고충이 있다만, 난생처음 20대를 살아가고 있는 1인의 입장에서 20대는 참 물음표 투성이다. 10대 때보다 커진 몸집과 굵어진 머리, 따라서 슬슬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냐 스스로 가해보는 압박, 늘어나는 부모님의 희끗희끗한 머리숱, 또래들 따라 아등바등 시작해 보는 사회생활, 그러는 와중에 한쪽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취업이냐 대학원이냐', ‘안정적인 직장이냐 새로운 도전이냐', ‘돈이냐 열정이냐', ‘좋아하는 일이냐 잘하는 일이냐' 하는 논쟁들...
문제는 이 모든 경우의 수에 정해진 답도 없고 누가 답을 정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적당히 돈 벌어 적당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도 있고, 땡전 한 푼 없다 갑작스러운 터닝포인트로 최정상을 찍는 사람도 있고, 무리수를 던졌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뭐가 됐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인생 게임에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 이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학창 시절 경제 공부를 더 열심히 했을 것이다. A국가와 B국가가 얼마만큼의 밀과 보리를 비교우위로 바꿔치기하는지 문제를 푸는 대신에, 사회에 나가서 어떤 능력을 길러 화폐가치를 창출하고 그중 몇 퍼센트를 투자, 적금할지 배우는 데 시간을 쏟았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 세대는 내 나이 때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나셨던 나의 부모님은 돈을 버는 족족 가족들에게 보내 살림에 보태야 했고, 제사와 명절, 가정의 경조사를 위해 고향을 지켜야 했다. 당신의 현재를 즐기기보다는 부모님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아끼고 모았다. 위로는 응당 그런 희생을 치르며 아래로는 그 고리를 끊어내 우리를 방목한, 시대 변화의 샌드위치에 낀 기구한 세대였다.
선택지 많은 삶이 주어진 세대의 역사가 아무래도 인류사에서 아직 짧은지라, 우리는 여전히 방황을 하고 정답을 갈구한다. 20대 월급은 얼마가 괜찮고, 이 나이대 애인에게는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 얼마 정도의 돈을 모아놓아야 안전하고, 어느 시점부터는 용돈을 받는 대신 주기 시작해야 하는지. 그 금액은 얼마가 적정한지 하나 하나 검색해보기 바쁘다.
그렇지만 결국 정답의 근사치를 찾으려면 네이버나 구글, 유튜브가 아닌, 그 선택을 짊어질 ‘나'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20대를 마무리할 시점 너의 모습이 어땠으면 하냐고. 30대가 다가올 쯤에는 어떻게, 얼마만큼의 밥값을 해서, 그 밥을 누구와 함께 먹고 싶으냐고.
자문해 본 결과 나의 답은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돈을 벌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몇 시간이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해낼 자신이 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게 된 재화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경험’을 위해 쓸 수 있을 만큼 넉넉했으면 한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생겼을 때 좀 더 마음 편하게 카드를 긁고, 함께 갈 파티원들도 마구마구 초청하고 싶다.
이번 발리 여행 덕분에 엄마는 난생처음으로 스쿠버다이빙을 해 꿈에 그리던 거북이를 보았고, 남동생은 졸업 후 해외살이 도전을 목표로 진로를 수정했고, 나는 가족들이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 취향 데이터를 확보했다. 나는 그렇게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기억에 남을 잔상들을 선물해주고 싶다. (슈퍼카를 모는 모습, 발코니에 앉아 고급진 와인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차와 술을 색깔로밖에 구분 못하는 문외한인지라 패스하였다.)
이런 나의 30대를 떠올려보면, 구체적인 숫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금전적/시간적 여유분이 필요할지, 얼마나 자주 소중한 사람들을 살펴야 할지, 하루의 몇 시간을 좋아하는 일을 위해 투자해야 할지 어림치가 그려지는 것 같다. 이를 상상해보지 않고 단순히 몇 천만 원, 몇 억 숫자 매김을 해보는 건 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수치로 된 타깃은 좋아하는 일 찾기, 가족, 친구들과 시간 보내기와 같은 숫자 너머의 목표를 자꾸만 까먹고, 타협하게 만든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연유로 나는 좀 더 나이 지긋해진 나의 30대, 40대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그때도 당연히 새로운 고민과 문제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방황하는 나를 가볍게 머리 콩 쥐어박고 넘어갈 수 있는 성숙한 으른이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