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만지는 여행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천생의 맹인들을 불러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멍에와 같다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키와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절구와 같다 하고,
등을 만진 사람은 침상과 같다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솥과 같다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과 같다 했다.
- 불교 경전 『열반경』 중
지구는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거대한 코끼리 같다. 지구 코끼리의 29%가 육지, 그 육지의 0.07%를 대한민국이 차지한다. 그러니까 세계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코끼리 발톱 정도만 보고 살아왔다.
여행지의 하루하루는 일평생 내가 믿어온 수많은 것들을 부정하는 ‘응 아니야^^’의 연속이다.
이걸 아침으로 먹는다고?
옷은 왜 그런 걸 입어?
변기는 또 왜 이렇게 지어놨어?
일상 모든 곳에 물음표 딱지가 붙는다. 내가 알고 있던 딱딱한 송편 같은 코끼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 알고 보니 코끼리는 절구도 되고 멍에도 될 수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을 체감하는 인지의 혁명이 여행의 묘미다.
환승에 진심인 나는 일부러 최장 시간 레이오버를 잡은 뒤 공항 밖을 나가 노는 고생을 자처하는데, 이번엔 마닐라가 당첨이었다. 처음으로 밟아본 필리핀의 풍경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1. 400년의 식민 역사를 가진 다문화 국가
스페인, 영국, 미국, 중국, 일본 무려 5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때문에 과거 필리핀 토착 원주민과 비교했을 때, 현재 필리핀 사람들은 선조부터 인종이 섞여 생김새가 다양한 편이다. 도시 풍경도 이쪽은 아시아, 저쪽은 유럽, 곳곳마다 특색 가득한 건물들이 붙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페인이 가장 오래 식민 지배를 했기 때문에(약 300년), 스페인 이름의 건물이나 스페인 식당들도 많다.
2. 7,461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 부자 국가
백 여개가 넘는 토착어가 있다. 그래서 따갈롱, 따가일로그라 부르는 타갈로그어(Tagalog)를 공용어로 삼는다. 타가(Taga)는 ‘~에서 온’, 일로그(Ilog)는 ‘강’이라는 뜻이다. 해상 교류를 도맡아 한 강에서 온 사람들의 언어가 제1국어가 된 셈이다. 같은 필리핀 사람이어도 타지방 출신일 경우 타갈로그어를 모를 수 있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땐 영어를 쓴다.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의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인도, 터키 멀리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사실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있는 우리나라 정도를 제외하곤, 전 세계 웬만한 국가들은 다인종, 다문화 체제다. 이들의 언어,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요소들은 항상 타자와의 연결 고리를 염두에 둔 듯 설계되어 있다.
포르투갈 사람과 스페인 사람, 러시아 사람과 우크라이나 사람, 튀르키예 사람과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각자 언어로 대화를 해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튀르키예 애들은 아제르바이잔어가 우스꽝스럽게 들린다고는 하는데, 사실 아제르바이잔 애들은 학교에서 러시아어까지 배우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자일지 모른다(학교만 다녀도 최소 4개 국어자).
코끼리 눈도 코끼리고 코끼리 귀도 코끼리다. 하지만 일평생 코끼리 발톱만 바라본 인간은 코끼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다양한 모양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K팝, K드라마, K거시기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고 있다지만, 실상 한국은 지구상에서 얼마나 외로운 나라이던지. 태평양 끄트머리 한민족(?) 국가라는 핑계로, 우리는 한국 밖에서 종종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무지하고 무례할 것이다. 이들과 달리, 우린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방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유럽에 폭염이 번지면 회사 팀 동료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나면 키예프의 친구가, 튀르키예에 지진이 나면 이스탄불 가이드를 해주던 친구가 걱정이 된다. 지구촌 뉴스 하나하나에 나의 소중한 친구, 지인들을 향한 걱정이 담긴다. 그렇게 신체 하나하나에 눈의 트여 거대한 코끼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코끼리 전체의 안녕을 헤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