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해석 겸 후기
학교가 소재인 극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해봤기
때문이 아닐까.
공감이라는 키워드에서 우선적으로 앞서나간다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학교라는 또 다른 사회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직 자아가 완전히 성립되지 않은 미성숙한 시기에 단체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장소인 학교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조직사회, 계급사회의 첫 발걸음이다. 학교 극은 이러한 청소년기의 불안정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학생들이 그 감정을 풀어내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준다. 또 다른 사회에서 좌절하거나, 친구들에 의해 극복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교칙에 상처받거나.
우리는 아무리 다른 나라의 다른 시대극일지라도 맥락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모두 학교이기 때문에. 그 아이러니한 분위기와 답습된 계급사회는 시대를 지나도 국가를 넘어도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약 2시간이라는 시간과 극장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속에서 나이 불문하고 학생이 되어보는 경험, 과거의 기억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 극을 보는 순간 학생 캐릭터에 과거의 미성숙한 내가 겹쳐 보여 신기하면서도, 그 캐릭터가 성장해가는 것을 보고 나오면 나의 성장도 이러했겠거니 공감하고야 만다. 정말 독특하고 새로운 경험이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독일의 유명 작가인 프랑크 베네킨트의 희곡 <눈뜨는 봄>을 원작으로 하여 2006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뮤지컬이다.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에도 다소 파격적인 내용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2009년 우리나라에서 선보인 초연도 마찬가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11년 재연을 이후로 저작권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극이 올라오지 못하다가, 2021년 브로드웨이 버전이 아닌 멘체스터 버전을 기본으로 한국 크리에이티브팀이 재창작한 세미 레플리카 버전으로 10년 만에 삼연이 공연되었다.
이 글은 2021년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기반으로 작성된 글이며, 해석과 리뷰는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작성된 글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1891년 독일,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19세기말 권위적이었던 독일의 청교도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원작인 <눈뜨는 봄>이 발표되었던 당시, 독일 사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0대 소년과 소녀들이 노골적으로 학교와 사회, 어른에게 저항하고 직접적인 성행위를 하며 자살을 시도하는 이 작품은 전체주의에 사로잡혀있던 독일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군대처럼 조직화된 사회에서 주입식 교육만을 추구하던 학교에 반항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은 암암리에 문제가 되고 있었던 교육 문제를 전면에 내놓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당시 큰 충격을 주었던 희곡 <눈뜨는 봄>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되었고, 21세기에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18세기 후반과 현재가 교육적인 부분에서 큰 개선점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이점은 100년여 전 희곡을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21세기와 동 시대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현시점, 특히 성적인 연출을 꺼리고 있는 사회에서 극을 바라볼 때 직접적인 성행위 묘사 연출은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연출적인 부분에서 소위 말해 극의 낡음을 당연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극이 내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직 유효하다. 아직도 대부분의 학교는 학생들의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있고, 그로 인해 학업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리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2021년 대한민국에는 자식이 탐탁지 않은 성적을 들고 온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모리츠의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가 존재하고, 얼마 전까지도 성적 비관에 의한 자살 기사가 포털사이트 메인을 장식했다. 100년 전에 지적했던 교육의 문제점이 100년이 지난 이후에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존재 이유가 확실하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오로지 아이들의 시선에서 쓰인 극이다. 극을 끝까지 보면, 성인 여자와 성인 남자가 극에 등장하는 모든 악인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부정적인 상황과 어른들의 편협한 시선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좌절한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오로지 아이들의 자아만 마치 선인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진정한 성장형 스토리’라고 표현한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어른의 개입 없이 아이들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람은 학교라는 한 공간에서 선생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착같이 아이들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아이들이 그런 어른들에게 저항한다고 하는 행동이 함께 손잡고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어주는 것, ‘믿음’ 아이들에게는 그게 전부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아이들 각자의 마음에 큰 의미로 자리 잡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나아가는 힘이 된다. 비록 상황을 되짚어 봤을 때,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아이, 멜키어에게 살아갈 의지를 선물해줬다는 점. 극 자체가 ‘친구들의 부재로 인해 고통만 받는 아이’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며, 그 부재가 절대 의미 없는 부재가 아니었다는 점. 어쩌면 서로의 믿음을 통해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이 악에 대한 최고의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 바로 이것들이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가슴 아프더라도 결론적으로 희망을 가져다주는 이유이지 않을까.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아이들의 시선으로 작성된 글이지만 작품의 관찰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 관찰자는 바로 신이다. 이 극에선 신으로 묘사되는 많은 것들이 등장하고 인물의 운명에 관여하는 등 극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이 극을 이해해가면서 가지게 된 가장 큰 의문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은 아이들을 도와주는 선한 존재일까, 아이들에게 적대적인 어른들의 편일까?
신은 언제나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조명의 형태로. 조명이 신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아주 밝은 빛이 딱 두 번 등장하는데, 멜키어와 벤들라의 건초보관장 장면과 모리츠가 죽는 장면이다. 건초보관장 장면에서 앞쪽에서 강하게 비추는 조명 아래서 멜키어와 벤들라는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모리츠는 마찬가지로 비슷한 조명 아래서 얼굴에 총을 겨누며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조명의 형태를 봤을 때, 생명의 탄생(멜키어와 벤들라는 하룻밤으로 생명을 잉태하게 됨.)과 죽음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있는 상대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모리츠는 ‘And Then There Were None’에서 화니 가보어(멜키어의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다가 총구를 옆으로 이동시켜 정면의 조명을 향해 겨눈다. 그리고 이젠 모두 끝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구를 본인에게 겨누며 암전 된다. ‘And Then There Were None’ 넘버가 끝날 때는 조명이 나오는 정면에 총을 겨누며 끝났지만, ‘Don’t Do Sadness‘ 넘버에서는 뒤에서 조명이 나오기 때문에 모리츠는 뒤를 돈 상태로 뒤에 총을 겨누면서 등장한다. 조명이 신이라는 것을 가정했을 때, 모리츠는 본인을 탄생시킨 신에게 총을 겨눈다, 즉 유일하게 신을 증오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모리츠의 총은 결국 ’Blue Wind‘ 때 일세를 향하게 되는데, 일세는 묘하게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캐릭터로 해석되기도 한다. 따라서 모리츠는 일세가 신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총구가 본인에게 향하기 직전 일세에게 향하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신을 증오하지만 신에게 겨눴던 총구가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스스로에게 겨눈 총구. 모리츠는 스스로 천사가 되었고 그 천사는 별들에게 가서 멜키어와 같은 아이들을 지켜줄 것이다.
신이 오로지 관찰만 하는 입장인 상황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는 인간사에 개입하여 신의 역할을 대신 담당하는 듯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바로 일세.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설정인 일세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세는 극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공허한 무대에 일세가 등장하여 촛불을 켜는 순간 노래가 흘러나오고, 절규하고 있는 멜키어의 뒤에 일세가 등장하고 자줏빛 여름이 찾아오며 극이 끝난다.
일세는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와 그 고통을 나누고,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노력하고,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해주려고 한다. 일세는 멜키어의 편지를 벤들라에게 전달해주고 벤들라의 편지를 멜키어에게 전달해 줬지만, 벤들라의 마지막 소식은 멜키어에게 알려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멜키어의 편지도 벤들라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이 이유는 아마 멜키어가 무신론자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신론자라는 멜키어의 설정은 극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멜키어는 어렸을 땐 교회를 다녔지만, 책을 읽고 난 이후부터 무신론자가 되었다. 멜키어가 교회를 다녔을 때 소꿉친구였던 일세는 멜키어가 무신론자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오랜 시간 후 그런 멜키어와 일세가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다. 멜키어가 소년원에서 무작정 도망쳐서 아이들의 무덤이 있는 교회에 도착했을 때, ”항상 교회로부터 도망쳤었는데 결국 여기네.”라고 말한다. 그 이후 멜키어 앞에 일세가 등장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자줏빛 여름을 부른다. 무신론자였던 멜키어가 신의 존재를 마주하였을 때, 맥락적으로 자줏빛 여름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앞에 서술한 내용처럼 신은 아이들에게 더 가깝게 기울어져 있지만, 나는 그렇다고 신이 온전한 아이들의 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벤들라가 멜키어에게 사과하기 위해 건초보관장을 찾아왔을 때, 벤들라는 ’다들 추수감사절 준비 때문에 교회에 있는데 본인만 겨우 빠져나왔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모리츠도 교회에 오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신에게 감사하는 절기이다. 신에게 감사하는 날, 참석하지 않은 아이가 벤들라와 모리츠 그리고 건초보관장에 홀로 있던 멜키어까지 총 세 명이다. 마지막에 벤들라와 모리츠는 죽음을 맞이하고 멜키어만 살아남는데 멜키어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다. 이 지점이 나에게 ‘신이 과연 아이들의 편일까?’라는 의문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마지막 넘버인 ‘Purple Summer’, 즉 자줏빛 여름이 해결해 주었다. 아이들만의 연대, 오로지 아이들이 일궈낸 놀랍고 신비한 자줏빛 여름이다.
신은 그 누구의 편이 아니다. 그저 인간사의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을 뿐.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들의 계락에 벗어났고, 스스로 절망적인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으며,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신에게 바치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짝을 찾는 다정한 말이었던 것이다.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극을 관전하고 있는 관객인 우리도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바라보는 신의 입장일지도 모른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우리는 무대에 서 있는 배우들에게 막연한 믿음을 주고 배우의 에너지를 통해 믿음의 상호교환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신이 바라보는 앞에서 사랑을 통해 어른들의 계락들을 극복해 나간다. 따라서 사랑, 이것을 빼놓지 않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말할 수가 없다.
스토리의 큰 영향을 미치는 멜키어와 벤들라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모리츠를 사랑하는 마르타와 모리츠를 구원해주고 싶어 하는 일세, 청소년기의 한낮 장난일 수도 운명적인 순간일지도 모르는 한센과 에른스트의 관계, 멜키어를 하염없이 사랑하는 테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토, 피아노 선생님을 사랑하는 에른스트까지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모두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담겨있다.
많은 사랑을 두 눈으로 관찰하다 보면 그 사랑의 형태가 ‘붉은색’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진행형 사랑을 하고 있는 마르타와 테아의 의상 상의는 원색 (붉은 계열)이다. 피아노 선생님을 사랑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게오르그는 붉은색의 전자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고, 한센과 에른스트가 서로의 만남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에른스트는 파란색 책과 초록색 책, 붉은색 책 중에서 붉은색 책을 선택해서 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글로 성에 대해서 깨우쳤다는 멜키어의 일기장은 붉은색이며, 벤들라가 멜키어에게 이 일기장을 전달해주면서 멜키어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편, 다른 아이들은 모두 ‘붉은색’인데 모리츠에게만 성적 충동이 ‘파란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로 나타난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성적 욕망을 가졌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모리츠만 사망 후 멜키어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리츠에게 잠자리에 대한 예술적 기법을 작성해줬다는 이유로 모리츠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이라고 추궁받음) 이게 모리츠 그리고 아이들의 결말을 예견한 게 아닐까. 모리츠의 결말이 결코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별종 취급을 받던 모리츠가 성적 충동도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파란색’으로 나타났지만, 그 파란색 성적 충동 모리츠에 의해 아이들이 자줏빛 여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여름을 파란색이 등장하여 자줏빛 여름을 만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한 모리츠를 사랑하는 마르타와 모리츠를 지켜주고 싶어 하던 일세의 마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세 아이들의 엇갈리는 관계가 가장 슬프면서도 극을 가장 짜임새 있게 만들어준다. 마르타가 모리츠를 좋아하고 그에게서 운명적인 끌림을 느끼는 것은 모리츠에게 자신과 비슷한 결핍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모리츠를 그저 정신박약이라고 표현할 때, 오로지 마르타만 그의 슬픔을 알아봐 주었다. ‘슬퍼 보이고 감상적인 잠꾸러기 모리츠 슈티펠.’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면 끌리는 법이다. 그래서 마르타는 모리츠에게서 보이는 익숙한 슬픔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어렴풋이 알아챘을 것이다. 슬픈 눈, 나에게도 있는 슬픈 눈.
마르타는 자신이 가정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친구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 상대를 관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르타는 모리츠도 자신과 비슷한 언어폭력과 압박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르타는 자신이 당하는 폭력이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리츠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것을 자신이 모른 척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애써 외면했던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더 마음 아파하게 된다. 만약 모리츠에게 무슨 일 있냐, 너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하냐고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옷으로 애써 감추고 있었던 나의 깊은 상처를 보여주기라도 했다면, 모리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을 없었을 것이라며 의미 없는 후회를 하게 될 마르타가 정말 안쓰럽게 다가온다.
일세는 그 반대이다. 자신이 악몽 같던 순간에서 스스로 탈출했기 때문에 과거의 내 모습이 보이는 모리츠를 구원하려고 애쓴다. 일세와 모리츠는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었을 거 같은 느낌이 있다. 커가면서 몸은 멀어졌어도 마음은 멀어지지 않은 사이. 소꿉친구라고 가볍게 정의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진지한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던 사이.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밀린 과제를 해야 해서 너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모리츠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일세에게 향했던 총구가 곧 있으면 모리츠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일세는 다 알고 있지만, 모리츠의 선택을 존중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결론적으로 자신이 구원하려고 했던 행동이 실패로 돌아가니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모리츠에게 약간 원망의 감정이 들고 스스로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모리츠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끝맺은 사람이다. 모리츠 스스로가 행복을 위해 떠나버리는 선택을 했으니 절대 그 누구도 슬퍼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자는 아무도 떠난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남아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질책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된다. 마르타는 본인이 그랬듯이 좋아하는 사람의 아픔을 내 마음속에 묻어버렸고, 일세는 본인이 그랬듯이 좋아하는 사람을 아픔에서 탈출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리츠는 자신의 아픔을 세상에 묻고 그 세상을 탈출하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모리츠의 선택으로 아마 마르타는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에게 저항하려고 시도해볼 것이고, 일세는 떠나온 자신의 집을 멀리서 바라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영원히 잠에 든 감성적인 잠꾸러기가 자신을 사랑해왔던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모리츠의 장례식 때, 일세는 모리츠의 아버지인 슈티펠 씨를 부축해주는데 마르타는 멀리 서서 그저 모리츠를 위해 추모한다는 점이 일세와 마르타의 큰 차이라고 생각했다. 모리츠의 소꿉친구였던 일세는 직접적으로 모리츠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서 모리츠의 결말에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다.
하지만 마르타의 관계는 일방적이어서 그저 바라보는 것, 그뿐이었을 것이다. 모리츠의 결말에 관여할 기회조차 없었고, 아무리 모리츠에게서 나와 같은 슬픔을 봤어도 그 슬픔으로 인해 어떤 선택을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갑게 식은 모리츠를 가장 먼저 발견했을 일세와 영원한 잠에 빠진 모리츠를 이제야 이해했다는 사실에 자책했을 마르타. 개인적으로 마르타가 더 슬픈 이유는 일세는 둘 다 온전한 상태에서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이 있다면, 마르타는 상대가 ‘관념’으로 나타났을 때 환상 속에서 시선을 교류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짝을 찾는 다정한 말들과 아기말”
21년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포스터에 있는 나비의 종류는 모르포 나비라고 한다. 모르포는 ‘변한다’, ‘바뀐다’는 뜻으로 나비의 푸른 날개 색이 각도에 따라 현란하게 바뀌는 현상에서 유래하였다. 환상, 사랑, 성 등을 상징하는 자주색 바탕에 바뀐다는 뜻을 가진 모르포 나비가 정 가운데에 있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포스터는 환상 속에서 사랑을 계기로 변해가는 나비, 즉 아이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르포 나비는 아무리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해도, 알들을 인공적으로 기르는 전문적인 모르포 나비 사육농장이 없는 한, 그 알들은 모두 자연 속에서 태어나는 시점부터 수많은 천적을 비롯한 각종 위험들과 싸워나가며 성충으로 성장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개체가 알이나 애벌레, 번데기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성충이 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결국 성충으로 무사히 우화해 다른 성별의 개체와 만나 교미, 번식하는 데 성공하는 개체는 소수라는 점이다.
모르포 나비의 성장 과정과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같은 선상에 두고 해석한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모르포 나비는 아이들, 수많은 천적은 어른들, 각종 위험은 극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 아이들은 모르포 나비와 같이 수많은 천적의 압박과 계락에 맞서 싸우며 날개가 부러지고 번데기에 갇혀있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노력한다. 살아남은 소수의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저 살아남았고 그저 살아간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포스터에 있는 나비가 날아다니는 나비가 아니라 ‘박제되어있는 나비’라는 점도 중요하다. 실제로 무대 세트를 보면 벽에 수많은 나비 박제가 붙어있다.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나비 박제가 조직화된 사회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모습이라면, 모리츠와 벤들라는 압정에 박혀있기보다 투명한 유리 속에 온전히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그들의 무덤 위에 있는 유리 소품 속에 나비 모형이 있음) 두 아이, 그리고 중간자 일세가 뻗는 손에 의해 멜키어, 마르타, 눈빛 손짓으로 함께했던 친구들이 몸에 박힌 압정을 빼내고 나비 날개를 펼쳐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애초에 나비가 애벌레에서 번데기, 성충이 되기까지의 모습 때문에 변화, 탈피의 상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속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오로지 순종적인 모습, 마치 번데기 같은 모습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번데기를 벗어던지고 나와 날개를 펼쳐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박제해 버린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통제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통제에 굴복하지 않고 박제마저 본인의 방식대로 떨쳐버린다. 놀랍고 신비한 자줏빛 여름을 함께 맞으며.
앞에도 언급했지만, 무대 벽에는 수많은 나비 박제가 붙어있는데 그 나비 박제들은 전부 조명 소품이다. 그 조명들은 아이들이 각성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반짝거린다. 예를 들어 멜키어의 어머니에게 원하지 않는 답변을 들은 모리츠가 자신의 현실에 좌절하고 각성하는 넘버인 ‘And Then There Were None’, 그리고 “미성숙한 시기에 감정에 휩쓸려 사랑하는 것은 악이나 다름없다.”는 어른들의 말을 뒷배경으로 한 채 멜키어와 벤들라가 건초보관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
나는 이러한 나비 박제 조명들이 박제된 상태에서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날갯짓을 하면 날개가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모르포 나비의 속성을 따라 갓 날갯짓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표현하는 듯했다.
모리츠는 요즘 수치심을 주는 환상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그 환상은 바로 ‘파란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강단 위를 올라가는 것’이 꿈에 자꾸 나온다는 것. 나는 이게 파란 나비가 강단 위를 날아가는 것을 파란색 스타킹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세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성적 욕망과 구별하지 못한 모리츠. 아니면 이 수치심을 주는 환상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할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의지를 가진 날개 달린 천사, 즉 박제에서 탈출한 파란 나비. 아이들이 조명으로 밝혀준 길을 걸어가는 모리츠가 강단 위를 날아가는 파란 나비가 아닐까. 천사가 될 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 모리츠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란 나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