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를 보육형 어린이집(이전 한국 나이 4~7세 반까지 있는 보육 중심 유치원)에 생각보다 일찍 보내기로 결정하게 됐다(어린이집과 혼선이 생길까 하여 지금부터 보육형 유치원으로 쓰려고 한다)
보통 아이가 5세(지금은 만 나이로 바뀌었지만 표기는 이전 한국 나이로 하겠다)가 되면 어린이집 졸업을 일반 학교와 같이 2월에 하고 유치원으로 3월부터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4개월 일찍 다시 원을 옮기게 됐다. 이제원에 적응해 잘 다니고 있는아이에게 적응의 고비를 다시 쥐어준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우리 부부의 끝없는 욕심일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정말 고심 끝에 한 결정이었다.
이른? 유치원
유치원은 어린이집보다 한 개 반의 정원이 더 늘어난다(예:어린이집 한 개 반 정원이 7명이라면 유치원 정규반은 14명 정도로 늘어난다). 그리고 커리큘럼도 보살핌 위주의 프로그램에서 조금 더 교육 중심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첫째 아이가 아직 3돌 가까워 오는데도 기저귀를 차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있어서 선생님의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기도 했고 이전 첫 원을 옮겼을 때의 경험(https://brunch.co.kr/@bdc307cd34d446f/30)때문에 유치원으로 다시 보낼 때 적응 문제가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때 마침 보내기로 생각하던 보육형 유치원에서 비어있는 자리가 생겼다.
1.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한국 나이 4세 반의 새로운 반이 개설되었고 이제 막 아이들이 들어와서 적응 중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끼리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이 됐다.
2. 변하지 않은 선생님 보살핌
또한 반의 정원이 7명으로 어린이집에서의 정원과 같았다. 5세 반에 비해 한 선생님 당 맡게 될 아이의 수가 적어 우리 아이가 좀 더 충분한 관심과 돌봄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3. 형님반 with 낮아진 장벽
미리 적응한 후 같은 원에서 5세 반으로 올라가면 기관을 옮기면서 5세 반으로 바로 가는 것보다 이미 친해진 친구들, 적응된 기관 시설, 낯설지 않은 원내 선생님들 때문에 적응에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4. 동반자
그리고 같은 어린이집에서 친해진 친구도 함께 가기로 했던 것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5. 가장 중요한 아이의 관심
미리 방문을 통해 아이의 반응을 세심히 지켜보았다. 단지 내 작은 아파트 방에서 큰 공간과 다양한 놀이 거리에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호기심 있게 다가갔다.
6. 마지막, 부모 욕심
마냥 아이의 첫 호기심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이동해야 한다면 좀 더 빠르게 넓은 공간에서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기 바랐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원을 옮길 준비를 했다.
아내 또한 다니던 원에 정이 많이 들어서 인지 못내 아쉬워했다. 선생님들께 정성 들인 손편지와 조그마한 선물을 드리며 아름다운 이별로 마침표를 찍었다.
다시 시작된 고통 하지만 보이는 희망
예상 못하진 않았지만 다시금 적응의 고통이 시작이 되었다.위에 늘어놓은 적응에 도움이 될만한 우리 부부의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ㅠ
고통 1. 멀어진 거리
우선 단지 내 어린이집에서 외지로 나갔으니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조금 더 가까이 위치한 유치원도 있었지만 그 유치원들도 모두 상당 부분 도보 이동이 길거나 차로 다니기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결국 아파트 입구에 정해진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버스를 태우는 것이 최적의 옵션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버스 적응이 문제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이동 간의 거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2주간 아침 출근을 늦게 하던 반차를 내던 하여 아이 등하원을 시키게 되었다. 그러다 전에 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와 함께 한 것이 큰 힘이 되었는지 드디어 버스를 타고 등하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통 2. 여전한 아이의 등원 거부
역시나 아침 혹은 저녁이 되면 아이의 마르지 않는 되새김이 계속되었다.
"유치원 가기 싫어"
매번 들을 때마다 우리 부부 마음에 비수를 꽂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늘 일관되게
"유치원에 가기 싫구나. 그래도 유치원은 가야 하는 거야"
이야기해 왔다.
그래도 아이가 너무 힘들어 할 수 있으니 아내와는 늘 1달 정도 보고 아이의 심리나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가차 없이 나오기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과의 가끔의 통화를 통해 작은 희망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원 내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 특히 밥을 잘 먹는다는 이야기는 뭔가 편해진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고통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왔다,
아이가 늦은 생일이라 연말이 다 되어 생애 첫 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게 되었다. 늘 친구들의 생일 파티만 지켜봐 오던 아이는 자신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아내와 나는 아이의 생일에 맞춰 전심을 다해 생일 파티를 준비해 주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주 옷 드레스와 당일 아침 포장해 온 미리 맞춤 케이크 등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에 차질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날 환하게 웃으며 어깨 가득 뽕 들어간 아이를 본 아내와 나는 크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후 아이의 원 적응이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다.
"나 유치원 가고 싶어"
매일 겪던 두통이 말끔히 씻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2월 졸업까지 순조롭게 걸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3월부터 대망의 5세 반, 진정한 유치원아로 형님반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4명으로 늘어난 형님반에서도 우리 부부가 생각한 대로아이가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른 시점에
갑작스럽게 아이의 등원 거부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 등원 거부는 스케일이 컸다. 전에는 등원거부를 해도 버스 탈 때는 순순히 타던 아이가 아예 타기를 거부하며 발버둥 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