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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y Sep 16. 2023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저주

<오펜하이머> 스포 있는 리뷰


Caution : 이 글은 결말을 포함한 스포가 담겨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작품을 강력하게 추천드리는 스포 있는 리뷰입니다.


오늘의 추천 작품은 2023년 8월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입니다.



1. 순간의 감정


과학자의 업적이 아닌, 인간 오페하이머의 삶은 그리 훌륭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유학 시절 패트릭 블래킷 교수를 독살하기 위해 사과에 시안화칼륨을 넣었던 것은
루이스 스트로스가 저명했던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리기 위해 작당했던 행동과도 같았습니다.
 

이론물리학에 강점이 있던 오펜하이머는 실험물리학을 진행하던 과정에서 블래킷 교수에게 핀잔을 들으며 앙심을 품게 되었고,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앙심을 품게 되죠.

사람에게 일말의 시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감정입니다.

세기의 존경을 받던 그들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둘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청문회에서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로 발목을 잡혀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인생은 닮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펜하이머는 그 독사과를 스스로 걷어들이면서 자신의 잘못을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스트로스는 평생을 마음에 담아두며 끝까지 개인적인 원한에 사로잡히다가 그 독사과를 스스로 삼킨 꼴이 되고 말았죠.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의 차이를 통해 인간의 치졸한 시기심이 얼마나 본성을 갉아먹는지를 체험하게 해 줍니다.  



2. 세 번의 죄책감


이 작품에서 오펜하이머가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시간의 흐름상 가장 첫 번째는 그가 대학원생이던 시절 블래킷 교수의 책상 위에 독사과를 올려두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급히 연구실로 달려가 독사과를 저지해 냅니다.

오히려 닐스 보어 교수가 그 사과를 먹을뻔하면서 그가 평생을 존경하던 스승을 잃을 뻔했었죠.

비교적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됐지만, 어쨌든 죄책감을 느낀 사건들 중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진 태틀록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다가 그녀가 사망하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입니다.

진은 오펜하이머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캐서린과의 결혼 전까지 진을 사랑했었고, 결혼을 한 후에도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진과의 부적절한 관계와 그녀의 공산당 이력은 후일 오펜하이머의 발목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죠.

그녀가 죽은 사실을 안 그는 아내와의 관계 악화보다 죄책감이 더 컸기에 캐서린에게 이 내용을 전달합니다.

오펜하이머의 과학적인 지성을 제외하면 오히려 단순한 면모를 보였던 사례 중 하나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개발한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사실을 체감했을 때입니다.

타임지 메인 표지에 실릴 정도로 세기의 존경을 받게 된 그는, 연설을 마치고 나오면서 원자폭탄 피폭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세상은 오늘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일본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이 폭탄을 독일인들에게도 쓰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분명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의 손에 피를 묻혔다는 느낌을 지워낼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일은 오펜하이머의 인생 중 가장 크게 느낀 죄책감이었습니다.



3. 제로섬 게임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불리한 증언과 부당한 질문을 받아내면서도 정공법으로 대응합니다.

심지어는 캐서린이 보는 앞에서 개인의 부적절한 사생활까지 들추는 바람에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사적인 일은 철저하게 분리하며 오펜하이머의 인생에 가려진 식탁보를 걷어내기 위한 조언들을 쏟아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부당하게 취급하도록 하고, 당신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얻도록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 정신 차려!" 


오펜하이머는 정치에 능하지 않았기에 모든 일은 스트로스가 계획한 대로 철저하게 그를 추락시키고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청문회에서는 유리한 증언을 이끌어내지 못하며 보안 인가를 받아내는데 실패하죠.


그런데 정작 스트로스의 청문회에서 의외의 인물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풀어줍니다.

결과적으로 오펜하이머를 믿어준 건 그의 아내인 캐서린과 데이비드 힐을 비롯한 소수의 과학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증언 탓에 스트로스 역시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며 장관직을 임명받는데 실패합니다.

스트로스는 잘못된 시기심과 분노로 오펜하이머를 나락으로 끌어내렸지만,

보좌관의 말은 애써 무시해 가며 끝까지 잘못된 오해로 오펜하이머를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When I came to you with those calculations, we thought we might have started a chain reaction that would destroy the entire world? 
I believe we did.
제가 계산식을 가져왔을 때요, 
저희가 전 세계를 파괴시킬 연쇄반응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었죠? 
이미 시작된 것 같아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더 심각한 문제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면서 스토로스와 같은 인물 따위로 사담을 나눌 여력이 없었습니다.

인류의 무모한 경쟁의식에서 피어나는 어마어마한 힘들이 연쇄반응처럼 폭발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는 흉한 꼴이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인지한 그들이 과학의 발전은 과연 인류에게 이로운 것인지 회의를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연쇄 반응이 도래한 미래를 상상하며 클로즈업되는 오펜하이머의 상기된 표정은 매우 압도적이었습니다.



4. 형식과 구성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에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형태로 내내 진행이 됩니다.
청문회에서 대화가 전개되는 중간중간 시점이 전환되며 오펜하이머가 겪었던 일들이 소개되죠.


이 영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굵직했던 중요 사건을 일일이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직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감정과 시선만을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특히 화면이 컬러와 흑백으로 시종일관 전환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오펜하이머가 겪고 있는 일이거나 그가 바라보는 시점일 때 컬러 화면으로 나타나고
오펜하이머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점일 때 흑백 화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컬러 화면의 영상이 압도적으로 러닝타임을 지배하고 있는데,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답게 그의 시선으로 더 많은 감정을 담아내려 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만의 특유한 표현기법을 감상하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매력적인 포인트 중 하나였습니다.



5. 번외


<다크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등 뛰어난 작품성과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영화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번 신작은 감독 경력 최초의 인물 전기 영화입니다.
 
특히 <오펜하이머> 이전의 과학 소재 영화들이 시간을 넘나드는 물리학을 바탕으로
난해한 작품을 양산한 바 있는 놀란 감독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이해도에 대한 우려가 많았는데요.
이 영화는 과학 영화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전기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의 사전 정보가 없어도 내용을 따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초반 부분에서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에 대한 관계가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가 살아왔던 시대의 배경 지식이나 당시 시대상의 과학자들의 업적에 대한 정보에 대해 미리 알아 두신다면 인물들의 감정을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대에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인류의 번영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했던 선구자이거나,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를 안겨준 위선자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이 작품은 그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또는 그 이후 세계사의 영향이 어땠는지는 크게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불을 건네준 대가로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의 1인칭 관점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만 집중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단순히 핵폭탄을 개발했던 위대한 과학자의 업적만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으로써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신이라 불렸던 인물의 비애를 낱낱이 그려낸 이 작품을 직접 경험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universalpictures.com/movies/oppenhe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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