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희곡
∙ 등장인물
이인현(16) : 코피를 달고 사는 만성 빈혈 환자. 타고난 허약 체질 탓에 몸보다 입이 활동적인 아이.
김국한(16) : 다한증에 두한증까지 있는 땀 흘리개. 퉁퉁한 외모까지 맞물려 붙은 별명은 '돼지국밥'.
∙ 시간/장소 : 초여름. 3교시가 끝나기 20여분 전의 교실
∙ 무대 : 배우가 입장할 미닫이문이 무대 왼편에 설치되어 있고 그 앞으로 인현의 책걸상이 놓여 있다. 국한의 책걸상은 우측, 비교적 무대 앞쪽에 설치돼 있다. 책걸상은 왼쪽을 향해 있어 배우가 앉았을 때 옆모습이 보이는 형태.
무대의 가장 앞쪽에 배우들 키만 한 창틀 두 개가 맞붙어 있어, 좌측에 앉은 인현과 우측에 앉은 국한의 자리를 각각의 칸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책걸상에는 인현과 국한의 책가방이 걸려 있고 인현의 책상 서랍 속에 교과서 한 권이 들어 있다. 국한의 책상 위에는 교과서와 필기구, 두루마기 휴지가 놓여 있다. 무대 오른편 안쪽으로 쓰레기통이 놓여 있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후덥지근한 공기 탓에 그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국한이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고 국한의 머리와 목, 가슴팍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인현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인현은 피 묻은 체육복 상의를 입고 오른쪽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았다. 휴지는 벌써 끝단까지 새빨갛게 젖었다. 인현, 고개를 치켜든 채 앓는 소리를 낸다. 인현과 국한의 눈이 잠깐 동안 마주치고 먼저 고개를 돌려버린 것은 국한이다. 인현, 창가로 다가가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인현 : 민재, 공 쫓아가! 어어, 옆에 조심해! (호들갑 떨며) 슛!
민재(v) : 야, 쟤 저기서 뭐 하냐?
아이들, 웃는다.
체육 선생(v) : 환자라고 열외 시켜 놨더니 위에서 중계하고 있네. 이인현, 고개 안 집어넣어!
인현 : 네엡! (몸을 뒤로 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축구공 날아가는 소리 등 교실 밖의 소리가 초여름 공기에 묻혀 멀어진다.
인현, 건들거리며 제 자리를 향해 걷다가 땀에 젖은 국한을 보고 역겹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리에 앉아 시계를 보는 인현, 수업이 끝나기까지 20여분이 남았다. 하릴없이 교과서를 펼쳐 책처럼 넘겨보던 인현은 다급히 코를 감싸 쥐더니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인현 : 아이씨…. (고개는 천장을 향한 채 일어나 두리번거린다.)
국한 : (앉은 채로 책상 위에 있던 두루마기 휴지를 건네며) … 이거 써.
인현 : (어색하다.) 어, 땡큐.
국한에게서 휴지를 받아 든 인현은 다급히 휴지를 갈아 낀다. 한 시름 놓은 인현, 국한이 건네준 휴지와 국한을 번갈아 본다. 국한이 땀을 닦을 때 썼을, 땀이 묻었을 휴지가 더럽게 느껴진다.
인현 : (집게손가락으로 휴지 집어 돌려주며) 국밥, 잘 썼다.
국한 : (인현의 집게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 본다.) …. (말없이 휴지를 돌려받고 이리저리 돌려 보고는) 코피.
인현 : 아, 갈다가 묻었나 봐. 미안.
국한은 휴지를 둘둘 풀어내더니 교실 뒤편 쓰레기통으로 가져가 버린다. 국한의 행동을 지켜보던 인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린다.
인현 : 야 국밥. 뭐냐?
국한 : 뭐가.
인현 : 그거 좀 묻었다고 뭘 그렇게까지…. (정색) 더럽냐?
국한 : 코에서 나온 건데 콧물이랑 뭐가 달라.
인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국한에게 다가선다.
인현 : 땀 때문에 체육도 못 나가는 새끼가…. 너 말 다했냐?
인현이 국한의 어깨를 밀치지만 국한은 미동도 없다. 인현, 뻘쭘하다.
인현 : (밀친 손을 옷에 닦아내며) 더러운 새끼.
국한 : (목소리 깔고) 이인현.
인현 : 왜, 덤비게?
국한 : 내 냄새 아니야.
인현 : 뭐?
국한 : 체육 끝나면 교실에서 나는 냄새. 내 거 아니고 니들 거야. 난, 향기로워. (강조)
인현 : 향기? (폭소) 뭐, 향기? 우길 걸 우겨야… (말하다 말고 킁킁댄다. 점점 국한에게 가까워지더니 코를 쥐어막고는) 씹, 향기로워. … 뭐냐, 너?
국한이 자리로 돌아가 가방 속에서 페브리즈, 섬유향수, 샤워코롱을 꺼낸다. 국한, 벙찐 얼굴의 인현에게 페브리즈를 뿌린다.
인현 : (놀라며) 야! … 꽃향기네? 너, 이걸 다 가방에 넣고 다녀?
국한 : 말했잖아. 땀냄새나는 건 너희라고. 땀에 절은 몸으로 교복부터 갈아입질 않나 선풍기, 에어컨 앞에서 땀냄새를 온 교실에 퍼트리 지를 않나. (격양된 말투로) 찌든 내, 암내, 호르몬 찌꺼기… 그 악취를 풍기면서 탈취제 한 번을 뿌릴 줄을 모르고 되려 나더러….
인현 : … 우린 왜 네 냄새라고 생각했지?
국한 : 너희가 언제 내 냄새 맡아보고 놀렸어? 냄새나게 생겼다고 놀린 거지.
인현 : 국한, (국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미안하다.
국한 : 됐어.
국한이 다시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자 인현도 제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펼쳐놓은 교과서를 빤히 쳐다보다가 집중이 통 안 되는지 교과서를 확, 덮어버린다. 인현, 몸을 돌려 앉아 국한에게 말을 건다.
인현 : 넌 체육시간에 교실에서 공부하냐?
국한 : 체육시간 아니어도 해.
인현 : … 너 공부 잘해?
국한 : 응.
인현 : 좋겠다. 나중에 좋은 대학 가겠네.
국한 : 응.
인현 : ….
인현, 거듭되는 단답에 빈정이 상해 몸을 도로 돌린다. 잠시 후, 무언가 번뜩 생각난 듯 다시금 국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인현 : 야, 넌 꼭 성공해라.
국한 : (무슨 소리냐는 표정)
인현 : 나중에 잘 돼서 “땀은 배신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존나 간지 나지 안겠냐?
국한 : (어이없어하며) 나 놀리냐?
인현 : 우리가 흘리면 그냥 땀이지만, 잘 된 놈들 땀은 노력의 대가라고 하잖아.
국한 : (다시 교과서 들여다보며) 노력의 대가는 무슨. 땀이 그냥 땀이지.
인현 : (기분 상했는지) 생각해서 기껏 말해줬더니. 그리고 땀이 왜 그냥 땀이냐? 땀 때문에 따 당하면서.
국한 : ….
인현 : (가방을 가리키며) 저거 다 땀냄새 신경 쓰여서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야? 체육 안 나가는 것도 결국 땀 때문….
국한 : 아니야.
인현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국한 : (신경질) 아, 아니라고!
인현 : (무안해서)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르냐? 그럼 체육은 왜 안 나가는데?
국한 : 심장이 안 좋아서.
인현 : … 그러냐?
몸을 돌린 인현,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국한이다.
국한 : 넌 성공하면 “코피는 배신하지 않습니다.”라고 할 거야?
인현 : (무슨 소리냐는 표정) … 아니?
국한 : 거 봐.
인현 : (덮은 교과서를 보며) 야, 그런 말도 성공한 놈이나 하는 거지.
국한 : 너 공부 못 해?
인현 : 응.
국한 : 그래 보여.
인현 : (일어나) 이게 진짜! 너 나 열받게 하려고 작정했지?
인현, 갑작스럽게 일어난 탓에 빈혈이 도져 제자리에 서 눈을 질끈 감는다.
국한 : 왜 그래?
인현 : (한숨) 빈혈.
국한 : ….
누군가 골을 넣었는지 운동장에서부터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인현,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 상황을 내려다본다.
인현 : 야, 국한! 우리 팀이 이겼어.
잔뜩 신이 난 인현이 창밖을 향해 환호를 지르자 저 아래에서 체육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삑─하고 들려온다.
체육 선생(v) : 옆 반 수업 중이잖아! 이인현, 창문 닫고 고개 넣어!
인현 : 네엡. (창문 닫는 시늉하고서 멋쩍은지 국한에게) 야. 넌 축구 안 좋아하냐?
국한 : 응.
인현 : 하는 거랑 보는 거 둘 다?
국한 : 응.
인현 : 좋겠다.
국한 : (말없이 인현을 쳐다본다.)
인현 : (창밖 보며) 20분 전만 해도 내가 저기서 뛰고 있었는데. 골도 거의 넣을 뻔했거든. 안 올라오고 계속 뛰었으면 내가 골 두 번은 넣었을 걸? 근데 너무 흥분을 했나, 갑자기 코피가 팡─. 난 축구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여기 있으니까 꼭 어디 먼 곳에 격리된 거 같아. (국한 보며) 넌 축구도 애들도 관심이 없으니까 좋겠다고.
인현, 밖을 보며 서 있고, 국한도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을 내려다본다.
국한 : 넌 저 시끄러운 데 끼고 싶어?
인현 : (끄덕이며) 쌉!
국한 : 왜?
인현 : (의아해하며) 그냥. 같이 놀면 재밌잖아.
국한 : 그렇구나.
인현 : 그러는 넌 왜 여기 혼자 있고 싶어 하냐?
국한 : 난 혼자 있고 싶다고 말 한 적 없어.
인현 : (놀란 표정) 그건 그러네. … 너도 혼자 있으면 외롭냐?
국한 : 글쎄.
인현 : 글쎄는 뭐야. 애들이랑 어울리고 싶은 거면 이제부터라도 껴. 애들 올라오면 내가 너한테서 꽃향기 난다고 어그로 끌 테니까….
국한 : 됐어.
인현 : 됐긴 뭐가 됐냐? 거 봐. 혼자 있고 싶어 하잖아.
국한 : 혼자 있고 싶지 않댔지 쟤들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는 안 했잖아.
인현 : 참 복잡하다 복잡해. 돼지국밥 육수충으로 불리지 않을 절호의 기회인데. 지금 아니면 졸업할 때까지, 너 냄새 안 나는 거 아무도 모를지 모른다.
국한 : 네가 알잖아.
인현 : 그건 그렇지만.
국한 : 중요한 건 내 냄새가 아니야. 내가 땀흘리개라는 게 중요하지. 너도 알잖아.
인현 : ….
국한 : 그래도 고맙다.
인현 : (멋쩍어서) 뭐가. 내 덕에 달라진 것도 없는데.
두 사람, 창밖을 보며 잠시 말이 없다.
국한 : … 언제쯤 멎을까?
인현 : 무슨 소리야?
국한 : 내 땀, 네 코피. 우릴 외롭게 하는 것들.
인현, 진지한 표정으로 국한의 말을 듣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코를 막았던 휴지를 뺀다.
인현 : 어, 멎었다.
국한 : (웃음) 축하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반 아이들이 계단, 복도를 지나 반을 향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국한, 말없이 창문을 연 뒤 자리로 가 앉는다. 국한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인현도 자리로 가 앉는다. 조명이 꺼진 뒤 여러 명의 목소리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유독 크게 들린다.
(v) : 아, 땀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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